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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o am I May 29. 2024

앤의 연애

실컷 부러워하고 실컷 질투하고 거절할 만큼 거절한 뒤 찾은 진짜 사랑

기존에 <빨간 머리 앤>을 다룬 여러 콘텐츠를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은 '앤의 사랑은 결국 길버트'였다. 이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다. 1권도 나오고 2권도 나오고 3권까지도 읽었지만, 앤을 향한 길버트의 짝사랑은 참 길고도 애틋했다. 솔직히 맨 처음 학교에서 머리를 맞은 이후로 앤한테 차인 게 몇 번이던가. 그 횟수도 세기 어렵다. 그래도 길버트는 결코. 네버. 포기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프린스에드워드 섬의 훈남에다가 못하는 것도 없고, 또래 여자친구들에게 인기도 많고, 대학까지도 훌륭하게 진학한 그가. 앤에게 그렇게까지 차이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책에 나온 대로 앤의 나이를 계산해 보자면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온 것이 11살이었고, 마을에 있는 학교를 졸업한 것이 16살 전이었다. 에이번리 학교가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초. 중등 과정이었다면, 퀸즈 스쿨은 초급대학 역할을 했나 보다. 2학년에 편입으로 들어가서 1년 만에 1급 교사 과정을 따는 과정에 도전한 앤은 장학금까지 받고 당당하게 졸업한다. 이후에 4년 제인 레드먼드 대학에 다시 갈 생각이었던 앤은 매슈의 죽음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섬으로 돌아와서 교사를 맡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항상 경쟁자이자 친구인 길버트 블라이드가 같이 있었다.  


청춘의 꽃 대학 시절..


앤 , 너 하고 싶은거 다해..


11살의 불안정했던 모습에서 불과 5년 사이에 눈부시게 발전한 그녀의 10대 청춘은 참 길고도 복잡하고 사건으로 가득 차있다. 초급대학에 합격하고 다시 돌아와 교사 생활을 하고, 입양아를 두 명이나 키우고 마을복지 사업을 하고 그러다가 다시 4년제 대학에 도전하는 그녀의 나이는 겨우 18살 정도.  스무 살 정도 나이에 온갖 인생경험과 심지어 교사경험까지 갖춘 그녀. 하지만 주변에 대한 부양 걱정 없이 청춘을 경험하며 꽃피는 시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당시의 나이 개념이 지금과 다른 것을 감안하더라도 참 대단해)




# 1. 두근거리는 에이번리의 마지막 밤


마을 개선 협회는 레드먼드로 가는 앤과 길버트를 위해 '송별회'를 열어준다. 이곳에서 앤과 길버트는 마을 주민과 친구들에게 선물과 축하를 받는데, 이 자리에서 마지막 순간에 앤의 기분은 확 안 좋아졌다. 길버트가 자기에게 뭔가 감상적인 말을 한 것이다. (요즘말로는 플러팅?).  굳이 정색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지만, 이 일로 앤은 길버트를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찰리슬론에게 친절하게 굴고 집에 까지 바래다주도록 만든다. 길버트는 별 반응 없이 루비 길리스와 같이 즐겁게 집에 걸어가는데, 앤은 또 여기에 상처받는다. 길버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음날 또다시 앤의 집에 찾아와 입학 전에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앤을 달래주면서 '너는 에이번리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가는 여성'이라고 격려해 준다. 길버트는 친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마을 사람이 있는 곳에서 적당한 거리조절 할 테니 염려 말라고 메시지를 준 것 같다.

이들의 뒤에서 마릴라와 린드 부인은 "둘이 언젠가는 좋은 짝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떠나기 전날 밤 둘은 달 빛 아래 '연인의 오솔길'에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며(본인 들만 데이트라 인정하지 않는) 나란히 걸었다.  심지어 그것이 아직 사랑인지도 모르는 순수한 앤이었다.



# 2.  질투


대학에 다니면서 인간관계가 늘어나고 복잡해졌다. 자기보다 훨씬 잘 사는 지역에서 부유하게 살아온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된 앤. 그녀들의 머릿속에 결혼과 연애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지만 덕분에 에이번리가 아닌 다양한 세상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어차피 상류층인 그들에 대해 앤은 부러움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반면 앤이 질투를 느끼는 것은 고향친구인 루비 길리스가 길버트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뉘앙스의 편지를 받았을 때이다. 


#3. 처음으로 받은 청혼


1학년을 마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 집으로 돌아온 앤. 집에 놀러 온 옛 친구 제인에게서 고향친구 4명이 모두 약혼을 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면서 제인은 자기 오빠가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보는데 곧 이어서 제인은 자신의 오빠가 앤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제인의 오빠는 에이번리의 농부로 봄이 오기 전까지 앤과 결혼하고 싶은데, 차마 직접 말을 할 성격은 아니라 동생인 제인에게 시켜서 이 말을 전달하게 한 것. 제인은 오빠가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고 평생 잘해줄 것이라며, 자기가 올케가 되고 싶다고까지 말하는데 이에 대한 앤은 '화가 났다'라고 까지 표현했다. 자기는 단 한 번도 제인의 오빠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제인은 너무 단호박스러운 앤의 태도에 기분이 다소 상한 얼굴을 지어 보인다. 앤이 아무리 대학까지 갔다고는 하지만 에이번리 마을에 고아로 입양되어 온 과거를 알고 있는데, '올케가 되고 싶다' '가족이 되고 싶다'까지 말한 호의를 거절당하니 기분이 상한 것. 제인은 그날 하룻밤을 자고 나서 만약 앤이 결혼 생각이 없다면 동네에서 살림을 잘하고 야무진 '네티'가 두 번째 후보이니 그녀가 결혼 상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앤은 이 말이 왠지 더 마음에 걸렸다.


따지고 보면 그 시대에 가장 현실적인 소개팅과 청혼과정이었던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나니, 앤도 왠지 뒷맛이 씁쓸했다. 어쩌면 자기가 생각한 이상적인 프러포즈와 결혼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현실. 아버지에게서 농장을 물려받은 제인의 오빠가 동네에서 가능성 있는 여자 1.2.3을 후보로 놓고 동생을 시켜 프러포즈시키는 그 과정이 현실을 자각시킨 것이다. (MBTI로 치면 T들의 세계관.. 과 정면 충돌했다고 할까. 동생도 T가 맞는 듯. 청혼을 한 것도 놀랍지만 Sensative 한 앤이 이 집안으로 시집갔을 때 결과를 생각하면 어떨지 상상이 간다)


#4. 루비의 죽음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음학기 방학에 앤이 교회에 갔다가 린드 부인에게서 (평소 질투를 느꼈던) 고향친구 루비가 폐결핵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앤은 용기를 내서 다이애나와 함께 루비 집에 방문하기로 마음 먹지만, 주변에서 폐결핵의 전염성을 이야기하면서 가지 말라고 충고를 듣는다.

그럼에도 방문한 루비 길리스의 집. 환자의 집 답지 않게 불이 환하고 방문객들로 가득 찬 것이 놀라웠다. 사교계의 여왕답게 방문객들과 함께 웃고 수다를 떨다가 마침내 둘을 데리고 2층에 가서 새로 산 옷을 보여준다. 가을까지 예상하면서 만든 옷. 앞으로 자기가 갈 화이트 샌즈. 앞으로 만날 남자. 하지만 루비 자신조차도 그런 대화가 공허함을 느끼고, 앤에게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고 사라진다.


얼마 후 상태가 나빠진 루비를 앤은 계속해서 방문하는데, 그녀에게서 '나는 지금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는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너무나 많은 그녀, 현생에서 손 끝에 닿을 것 같은 그 모든 것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차마 내키지 않는 그녀가 그것들을 다 누리지도 못한 채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며 안타까운 말을 남기고 몇 주 후 그녀는 정말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앤은 자기가 어린 시절부터 평생 갖고 싶어 했던 금발머리와 하얀 피부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친구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관에 누운 그녀가 너무 예뻐서였을까. 앤은 자신이 느낀 질투가 한편으로는 쓸모없는 것이었고, 겉으로 보이는 물질적이고 외적인 면이 사실은 본질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5. 길버트의 고백

첫 고백과 마지막 고백은 한결 같이.. 그래도 너라서 참 다행이야


루비가 죽긴 했지만, 그래도 길버트를 염두에 두는 여자친구들은 항상 주변에 많았다. 앤은 '길버트가 돈이 많았으면 걔랑 결혼했을 거'라는 필리파의 농담에도 왠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길버트가 앤이 친구들과 자취를 하고 있는 집에 직접 찾아와 자신은 이번 방학에 에이번리에 가지 않고 '데일리 뉴스'에서 일할 거라며 밑자락을 깔았을 때, 앤은 살짝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놀랍게 길버트는 이 말에 이어 앤을 붙잡으면서 정말로 결혼해 달라고 간청한다. 앤은 언젠가 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으면서도 이 말을 애써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절대 할 수 없다. 좋아할 뿐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이 말에 길버트는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그때 길버트의 얼굴이 핏기하나 없이 창백하고 기괴하다고 까지 표현했을까. 길버트가 돌아가고 나서도 앤은 필리파가 '너 참 바보다' 하는 말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 왜 이상하냐?'라고 묻는데 이 말에 필리파는 날카로운 한 마디를 던진다. 


'넌 사랑을  눈앞에 두고도 모르고 있는 거야. 사랑이라고 생각하면서 상상 속 무언가를 만들어놓고는, 실제로는 사랑이 그렇게 보이기를 기대하는 거라고.'


팩트폭력을 맞은 앤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낭만적인 것을 쫓다가 알게 모르게 자기가 의지해왔던 길버트와의 관계가 끝났음을.

그러나 앤은 그 책임을 길버트에게 돌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앤은 진짜 연애의 세계. 잘 생긴 훈남들과의 썸을 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음 편에..


대체 이 훈남은 누구인가..



앤은 길버트의 청혼을 거절했을까? 이미 친구들이 다 결혼을 앞두고 있고 자신도 그 나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예측은 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아주 싫어하는 타입의 찰리슬론이나 동네에서 주선하는 맞선보다는 훨씬 좋은 상대인 길버트가 청혼해 왔는데, 여지를 남기고 거절한 것도 아닌, 단호박으로 잘랐을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확실한 것은 제인의 오빠가 청혼했을 때도 그랬지만 앤에게 청혼과 결혼은 현실의 영역에 있지 않았던 것. 길버트 자체가 싫지는 않고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도 없지만 앤의 이상은 동네 친구보다도 훨씬 높은 눈(아마도 로맨스 소설에 가까운)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오죽하면 옆에서 철없다는 필리파가 충고를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후에 앤은 환상을 한 장씩  깨고, 자기의 부모님의 옛 모습, 훈남 남자 친구와의 사건 등 여러 사건을 거쳐 현실 자각 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아마도 중요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자신과 길버트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소중한 것이라고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연애도 해볼 만큼 해 보고 최후에 후회 없이 만날 한 사람을 찾는 게 결국 진리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물론 그렇게 살지 못했지만..


자작 일러스트

  

디자인 일러스트 출처: 현대지성사, < 레드먼드의 앤> 그린이 유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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