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ho am I Feb 22. 2024

폭죽이 터지고 바람개비가 날아다니던 날, 앤 깨달았다

매 순간 상황 통제를 완벽하게 하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 아닐 수도

 단체에서 문제가 터졌을 때 최악의 리더십은 사고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맡기는 것이다. 나는 비록 같은 정도의 난처함을 겪게 되더라도 '우리'에게는 좀 더 나은 대응 방식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이 어려움의 무게를 모두가 조금씩 나누어지면서 상처가 회복되도록 서로를 돕는 것이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움직여 해결하는 것이 구성원들의 스트레스를 낮춰준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 서로 싸우느라 해결은 뒷전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에게 책임을 씌우기보다 자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능동적으로 사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이는 길이다. 어찌 되었든 내가 하고자 하는 방향대로 한번 밀고 나가보는 것이다. 인생은 어쨌든 어디론가 흘러가기 마련이고 그것은 우리가 항상 예상한 방향과는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의 끝은 아니다.


재앙의 날 - 앤의 반에서 일어난 '그 사건'


앤이 학교에서 모든 사건을 겪은 날도 그랬다. 앤은 전날 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치통을 앓았다. 닐이 흐려 매섭게 추운 겨울날 아침에 눈을 뜬 앤은 인생이 시시하고 시들하고 무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 갈 때도 천사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뺨이 퉁퉁 붓고 얼굴이 아팠다. 난로에 불이 붙지 않아 교실은 춥고 연기가 자욱했다. 아이들은 난로 주변에 모여 앉아 달달 떨고 있었다. 앤은 전에 없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이들을 자기 자리로 돌려보냈다. 앤의 반에서 가장 말을 안 듣는 앤서니 파이는 언제나처럼 건방지게 거들먹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짝꿍에게 무언가를 소곤거리다가 앤을 흘깃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사건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날 아침 따라 앤에게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바버라 쇼는 산수 계산을 들고 앞으로 나오다가 석탄통에 걸려 넘어지면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날 앤의 상태는 바버라의 실수를 따뜻하게 감싸줄 정도가 못되었나 보다. 앤은 바버라에게 '칠칠치 못하다'며 책망의 잔소리를 보냈다. 바버라는 눈물과 검댕이 섞인 슬픈 모습으로 자기 자리에 돌아갔다. 자기가 너무나 좋아하는 따뜻한 선생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것 생각지도 못했던 것. 덩달아 앤의 마음도 불편해졌다. 하필 그날 따라 진행한 과목이 산수여서 그랬는지 앤의 태도는 딱딱했고 아이들은 고통스럽게 문제를 풀어갔다. 그즈음 지각생이 뒤늦게 학교에 들어왔고 아니나 다를까 지각생의 입에서는 변명의 말들이 쏟아졌다. 평소 같으면 그러려니 했을 핑계도 유난히 선생님을 건드렸다. 자리에 가서 앉으면서 1차로 진정이 됐는데 지각생은 자리에 앉아 친구에게 가기고 온 물건을 돌렸고 그게 또 앤의 눈에 띄고 말았다. 예전에도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먹을 걸 주고받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앤은 물건을 처음 준 세인트 클레어 대신 물건을 받은 조를 불러냈다.

"조지프, 그 꾸러미 이리로 가져와"

이 조라는 학생은 장난꾸러기면서도 놀라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말을 더듬는 착한 아이였는데, 그 순간이 아이는 겁에 질려 자신이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고 스스로를 생각했다.

앤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로에 넣어"

조는 멍한 얼굴로 못하겠다고 변명을 했다. 더듬으면서 하는 요청은 애절할 정도였다.

정말 이때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앤은 난로에 꾸러미를 넣으라고 카리스마 있게 다시 한번 말했는데 여린 조는 선생님의 명령에 정말 안쓰러운 표정으로 친구인 세인트클레어의 눈치를 보면서 난로로 걸어가 난로 안에 물건을 던져놓고 도망쳤다. 친구인 세인트클레어가 말릴 새도 없었다.


몇 분 동안 에이번리 학교 학생들은 지진이 일어난 건지 화산이 폭발한 건지 영문을 모른 채 공포에

빠져들었다. 단순히 꾸러미 안에 케이크 정도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앤의 예상과 달리 꾸러미 안에는 사실 갖가지 종류의 폭죽과 바람개비가 들어있었다. 조의 집안의 누군가가 그날 생일 축하파티에 쓰려고 세인트클레어 아버지에게 시내에서 사다 달라고 요청한 것인데 하필이면 그게 수업 중에 앤의 눈에 띄어서 난로로 들어가는 불운을 겪게 된 것이다. 폭죽은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터졌고 바람개비는 난로에서 튀어나와 쉭쉭 소리를 내며 교실 안을 미친 듯이 날아다녔다. 하얗게 질린 앤은 의자에 주저앉았고 여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책상 위로 올라갔다. 이 난리통에 조는 교실 한가운데에 얼어붙은 듯이 있었고

사건의 제공자인 세인트 클레어는 통로에서 몸을 흔들어 젖히며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 총체적 난국.

한 명은 정신을 잃었고 한 명은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엄청나게 긴 시간에 일어난 것 같았지만 사실 고작 몇 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앤은 벌떡 일어나 교실 문과 창문을 열어 안을 가득 채운 가스와 연기를 내보냈다.

그런 다음 여자아이들은 기절한 프릴리를 현관으로 옮겼다. 그 타이밍에 평소에 아무것도 도움이 되질 못해 미안함을 느꼈던 바버라 쇼가 프릴리의 얼굴과 어깨에 얼어붙은 물을 가져와 부워버렸다. 그렇게 1차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2차 사건이 남아있었다. 학생들은 오후 내내 뭔가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사소한 실수에도 선생님의 꾸지람을 들었고 그들 스스로가 뭔가 심각한 잘못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수치심을 느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앤이 자기 스스로 터무니없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동료교사들도 자기를 웃음거리로 삼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 사실이 웃기기는커녕 앤의 화를 더 북돋았다. 차분한 상태라면 상황을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그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앤은 그런 사실을 차갑게 무시해 버렸다.


악마는 항상 사람이 가장 약할 때를 노리는 걸까. 작은 악마가 앤서니 파이의 마음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 이 상황을 이용하라고 부추긴 것이 틀림없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반에 들어왔을 때 아이들은 하나같이 책상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앤 교실의 가장 악동인 앤서니 파이였다. 앤서니는 책 너머로 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까만 눈동자에 호기심과 웃음을 담은 채로 앤을 바라보았다. 앤이 분필을 찾으려고 책상서랍을 뺀 순간, 손 밑에서 살아있는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후다닥 책상을 넘어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앤은 마치 뱀이라도 본 것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펄쩍 물러났다. 그 모습에 앤서니 파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침묵이 흘렀다. 몹시 오싹하고 불편한 침묵....

아나타 벨이 묘사한 바에 의하면 앤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상태였고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고.

앤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누가 내 책상에 쥐를 넣어놨니?"

오전에 사고를 친 조가 자기는 아니라고 더듬으면서 부정을 했지만, 앤에게 바로 무시당했고 앤은 곧바로 앤서니 파이에게

 다 다가서 다그쳤다.

앤서니는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된 것처럼 뻔뻔한 얼굴로 앤을 쳐다봤는데

네가 그랬냐는 앤의 물음에 "네, 제가 그랬어요"라고 바로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이 상황은 안타깝게도 매를 부르고 말았다.

앤은 이날 선생님이 된 이후 처음으로 앤서니를 체벌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지시봉에 맞은 앤서니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앤이 살살 때렸다고 하지만 앤서니 입장에서는 이전에 맞은 어떤 체벌보다도 아팠던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양심의 가책으로 지시봉까지 떨어뜨린 앤은 앤서니에게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말한 뒤 자신도 교사 책상으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곳에서 자신의 감정에 몰아치는 자책감의 후폭풍을 마주해야 했다. 학생을 어떻게라도 때리지 않고 가르치고자 마음먹었던 처음의 각오에 비해 이토록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 여러 가지 후회와 감정들이 몰아쳤다. 나중에 주변에서 알게 되었을 주변 사람들의 비웃음도 생각이 났지만 사실 앤이 가장 안타깝고 속상하다고 느꼈던 분은 더 이상 학생과 친해질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그날 집에 돌아올 때까지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 자신의 다락방에 와서 후회와 부끄러움, 실망감을 모두 쏟아내듯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예전에 내가 학생이었을 때, 사실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깊이 생각해 적이 없었다. 선생님이 나를 대하는 것에 대한 부당함만 잔뜩 느꼈을 뿐이었다. 학생입장에서 체벌은 감정적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선생님으로서 상황을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은 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다시 생각해 보니 생각이 좀 바뀌었다. 선생님과 학생 둘 다 에게 화를 북돋울 수 있는 나쁜 주변 상황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이다. 다시 말해 앤이 겪은 재앙의 날에는

첫째, 선생님 건강이나 신변이 안 좋음

둘째, 나쁜 날씨 가령 너무 추운 날 너무 더운 날

셋째, 교실 환경의 열악함

넷째, 의사 표현의 어긋남. 특별히 자기표현을 잘 못하는 학생과의 어긋남

다섯째, 말 그대로 불운 (난로에 던져 넣은 게 폭죽인 것 같은)

여섯째, 너무 어려운 수업

일곱째, 여러 학생들의 실수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

여덟째, 선생님을 놀리려는 학생의 장난

아홉째, 선생님의 주변에서 잔소리하거나 교사의 자질을 비웃는 시선


이 모든 게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변명 같지만 말이다. 이것은 조금 바꿔서 생각해 보면 부모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체벌 없이 교육하겠다던 앤의 가치관이 이 9가지가 넘었을 듯한 나쁜 상황 속에서 흔들렸고, 마침 때마침 앤 앞에 있었던 지시봉이 상황을 통제하는 최후의 도구로 쓰인 것이다. 왜 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앤이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앤을 진정시킬 수 있는 요소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다른 날이라면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은 앤의 마음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한 없이 바닥으로 들어가고 싶은 앤의 심정은 가오리와 닮았다

집에 돌아와 우는 앤에게 마릴라는 무슨 일이냐며 묻는다. 앤은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게 아이를 체벌했다며 마릴라에게 하소연을 하는데 마릴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진작에 그랬어야 했다는 것이다. 앤은 열심히 부정하면서 아이들 얼굴을 어떻게 다시 볼 지 모르겠다고, 아이들이 분명 자기에게 실망했을 거라고, 앤서니 파이와 친해질 기회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다 허사가 됐다고 자책했다.


마릴라는 고된 일로 거칠어진 단단한 손으로 앤의 윤기 나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너는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너무 많아. 우리는 모두 실수를 한단다. 하지만 사람들은 잊어버려. 재앙의 날은

누구나에게 오는 법이야. 앤. 앤서니 파이가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무슨 상관이냐. 그런 애는 그 애 하나뿐인데."

마릴리는 앤의 어두운 마음에 한줄기 빛 같은 위로를 주었다


앤은 어쩔 수 없다고. 모두가 자기를 사랑하길 바란다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다고. 또다시 자책을 시작했다.

마릴라는 앤에게 늘 그렇듯. 오늘은 지나갔고 내일 또 하루가 시작될 거라고. 아직 아무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 하루가 올 거라고. 저녁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마릴라는 거의 앤의 엄마에 가까운 존재가 된 것 같다.


 어쨌든 마릴라의 저녁을 먹고 나니 기운이 좀 나아진 앤은 아무 생각 없이 푹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자신도 세상도 달라져있었다.


어둠이 내린 사이 눈이 소복이 쌓였고, 아침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는 하얀 세상은 지나간 모든 실수와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자비로운 망토 같았다.


"날마다 아침은 새로운 시작.

날마다 아침은 새로 태어난 세상."


이 날 아침 앤은 눈 쌓인 길을 피해 가다가 앤서니 파이와 마주치게 되는데 놀라운 건 그다음부터였다.

앤서니 파이는 처음으로 모자를 벗고 앤에게 인사를 건넸다. 거기다가 "책을 들어드릴까요?"

라는 말까지.

앤은 속으로는 좋은 내색을 감추면서 앤서니에게 책을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앤서니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는데 이 미소는 형식적으로 짓던 '친절한' 미소가 아니라 돈독한 동지애를 느끼며 샘솟는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였다. 앤소니도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선생님들이 모두 형식적으로만 자기를 대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진정으로 반응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아이는 마음을 조금 연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이마저도 힘들겠지만 말이다.)


후에 앤에게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앤서니가 앤을 '그래도 좀 괜찮은 선생님인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고. 그래서 앤에 의해 정신을 차린 남자는 길버트에 이어 앤서니 2명으로 늘어났다.


그렇게 해서 앤은 한없이 친절하고 좋은 선생님에서 인간적이면서도 현장에 익숙한 교사로서 한 번 더 발돋움 하게 되었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렸던 태도를 버리고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온 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음의 짐을 덜게 되자 한층 태도가 자연스러워지고 교사는 '00'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진실한 마음으로 수업에 임하게 되었다. 마치 모든 것을 치료해 주는 깨끗한 첫눈의 치유로 말이다


  

 

 









 




이전 05화 트러블 메이커, 앤 셜리 첫 출근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