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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Mar 23. 2021

절경을 만날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치지 않는법

직업의 세계관이 열리는 프롤로그

“항공사를 9년이나 다녔는데, 아직 안 가본 곳이 있어요?”


“만리장성이요.”   


2020년 12월 코로나의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다가올 줄 모르고 있었다. 우리는 베이징에서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 중국은 설 명절, 민족 대 이동으로 도시는 비어있었다. 차로 1시간 30분쯤 달려서야 시내에서는 보이지 않던 ‘ Great Wall’ 만리장성이라는 표지판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베이징시 외곽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았고,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무엇이 다가올지 알고 대피한 분위기다.

산등성이에 끝없이 연결된 만리장성의 형체를 바라보니 어쩌면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들이 도로에 서있다. 차량 통제다. 뒷좌석에서 얼굴을 앞으로 빼고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를 짐작해보니 어제까지는 열었지만, 오늘은 닫고, 내일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날부터 만리장성이 폐쇄되었다.


“전에 회사에서 등산을 온 적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멀리서도 잘 보여요, 가볼래요?”

함께한 일행이 뭐라도 하자는 의지를 보이며 말했다. 눈이 쌓여서 차가 못 올라가는 지점까지 차로 산길을

 올라갔다. 무작정 용기를 냈다.

나는 롱스커트에 닥터마틴 워커를 신고 장갑과 마스크 외엔 아무런 등산 준비 없이 산책 정도로 여겼다.

포장된 산길은 아니었지만 거친 큰 돌들이 있어 오르기 편했다. 누군가 버린 사탕 껍질이며, 과자 봉지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드나든 흔적에 기대를 품게 되었다. 정말 이 산 끝에 만리장성의 입구가 있을까? 이러다 만리장성을 가는 거 아냐? 어처구니없이 황송할 거 같았다.

우리는 새 떼처럼 번갈아 가며 선두가 되었다. 산 모서리를 돌 때마다 없을 것 같은 길이 나타났다. 만리장성이 가깝게 느껴졌다.

 터무니없는 헛된 희망보다는 우리에겐 현실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나의 태도와 성향은 우상향이다. 근거 있는 낙관론은 각오를 다지게 한다. 긍정적인 말은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게 만든다.

점점 산이 가파라지자 거대한 담벼락이 나타났다. 우리 머리 위에 만리장성이 있었다. 유목민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세운 성벽에 우리가 잠입한 걸 알고 어딘가에서 화살이 날라 올 것만 같았다.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나는 괜히 눈에 띌까 쓰고 있는 주황색 모자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달에서도 만리장성의 모양이 보인다는 2700km의 성벽 아래였다. 스파이더맨이라면 손바닥으로 집고 몇 번이면 올라갈 만한 높이 같기도 했다. 지형의 높낮이에 맞춰 쌓아 올린 장벽이라 산의 모양에 따라 높이가 달라졌다. 우리는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며 돌벽을 쓰다듬었다. 감탄하며 그 아래 앉아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여기까지도 좋았다.

 이리 와봐! 세상에나, 담을 넘을 작정이었다.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문이 있었다. 자물쇠로 굳건히 잠겨있다.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초도 안내자도 없었다. 우리는 누군가 올라간 흔적이 보이는 나무를 딛고 만리장성 성벽으로 올라갔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로 2007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된 만리장성을 점령한 순간이었다. 케이블카도 타지 않고, 산길을 겁도 없이 걸어왔다. 고등학교 때 떡볶이를 먹으러 담을 넘은 이후로 숨 졸이며 필사적으로 넘은 담은 처음이었다.

만리장성에는 아무도 없었다. TV나 사진에서 본 것처럼 인파 속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걸어 다니는 장면과는 달리, 오로지 우리뿐이었다. 중국 고대에 쌓은 견고한 진에서 풍기는 돌 향기에 내 마음도 숙연해졌다.

 

만리장성에서


나란히 한참 동안 굽이진 풍경을 바라보니 이 자리에 서있기까지의 과정이 생각났다. 20대부터 30대까지의 직업들에 구슬이 꿰어지는 것 같았다. 원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자꾸 장벽에 부딪혀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과 기대와 희망으로 이뤄낸 이야기가 산 굽이굽이 만리장성처럼 펼쳐지는 듯했다.     

나는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도예가로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주변에 외국 여행을 가거나,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었다. 도대체 어떤 직업을 가지면 외국으로 나갈 수가 있을까?


내 첫 직업은 항공사 승무원이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내 인생이 업그레이드될 거 같았다. 그리고 꿈 때문에 속 끓이는 날들이 길어졌다.

정말 중요한 건 외국에 가면 무엇을 할 것인가다. 관광객으로는 알 수 없는 현지인들의 생활에 동화되어 살기로 했다. 풍부한 감성 때문에 향수병을 달고 다녔다.

85개국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예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비행은 경험을 풍부하게 축적해나가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승무원은 부유하는 노매드 라이프를 실현하고, 미래를 준비하기에 좋은 직업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만화경처럼 펼쳐졌다. 세계를 빙글빙글 돌며 놀라운 광경이 반영되어 내 삶도 다양한 인생의 무늬로 변해갔다. 풍부한 일상의 장면들과 생각들이 변주되어 아름다운 모양을 나타냈다. 같은 모양, 같은 매일은 없었다. 조각 같은 일상의 장면들을 모아 짧은 시간에 많이 경험할 수 있었다.

직업은 세계 각국의 진미를 맛보기로 경험하는 일이었다. 미슐랭 스타를 찾는 일이다. 그러다 내 취향을 알게 된다.

외국에서의 사회생활은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거기서 버텨낸 근성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 퇴사를 결심한 동료들은 열정적으로 순간을 누렸다. 불안하지만 설레는 미래를 위해 치열하고 성실하게 퇴사 준비를 해나갔다. 실제로 사진 전공한 동료는 승무원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사진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또, 비행하며 세계의 음식에 눈을 뜬 승무원은 요리학교에 들어가서 요리사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반복된 일을 버텨낸 보상으로 콘텐츠라는 결과가 생겼다. 내가 겪은 모든 경험과 경력들이 실력이 되어 내 소중한 콘텐츠가 되는 것을 목격했다.


만리장성을 넘은 이야기는 내 캐릭터다. 짜릿한 도전과 모험정신을 발휘할 기회고 타이밍이라 생각되면 놓칠 수 없다. 절박하고 절실할수록 두려움이 사라진다. 침입하고 정복하는 마음으로 꿈의 장벽을 올라타곤 했다. 올라가서 본 세상은 경이롭고 놀라운 일들로 넘쳐났다. 절대 넘지 못할 것 같은 벽이라는 공포, 두려움은 내 안에 늘 있다. ‘나’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베이징에 다녀온 이후로 전 세계에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베이징에 살던 가족들은 독일로 이사를 갔고,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그동안 특별한 경험의 센스로 공간 콘텐츠 브랜딩이라는 새로운 일을 해내고 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겸허하게 도전한다. 닫혀진 만리장성 문을 열듯이, 우리의 직업과 진로는 두려움과 장애물을 만날때마다 뛰어넘어야 한다. 나의 3개의 직업은 용감한 모험의 기질과 센스의 결과물이었다.


요즘 나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을 살아가며, 해외에서 많이  경험으로 키운 감각을 쓰고있다. 여행자처럼 주변을 예민하게 둘러 보는 일에 내공이 쌓여 관찰하는 성향이 되었다. 세상에 어떻해서든 껴서 소통하려고 나의 감각을 믿고 공간 브랜딩 기획이라는 새로운 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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