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집 구하기 - 3
서울에서 집 구하기 -
사실 난 (리본을 묶자면) 굉장히 유한 사람이다. 결단력과 추진력은 있지만, 엄한 데서 무른 구석이 있다. 똑똑한 척 굴지만 종종 어설프고, 단단한 척 하지만 부러지곤 한다. 이번 기회에 나는 부침 두부 정도는 될 요량이었다. 순두부는 쉽게 터지니까. 그리고 집을 구하며 다시금 깨달은 사실이 있는데 나는 낯선 사람에게는 싹싹한 기존쎄다. 고작 몇 년 사회생활이지만, 많은 사람을 상대하며 쌓은 스킬은 다름 아닌 웃으면서 할 말 하기였다. 먹고사는 문제가 사람을 이렇게 만든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제가 손녀여도 이 집을 추천하세요?
인연이 번개처럼 찾아온다고 생각하는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집도 그렇다. 내가 그랬다. 이 집이 진짜 내 집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순간의 고민으로 놓치기도 했고 마음에 쏙 든 공간이라도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하기도 했다. 많은 걸 바라진 않아도 이것만큼은 절대 못 참지, 싶은 구석이 있으면 찜찜한 게 사람과 집의 공통점이다.
시간만 가고 마땅한 집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내 집에는 사람이 참 자주 찾아왔다. 지금 집 보러 가도 되냐는 문자와 전화가 수시로 왔다. 누구 속도 모르고. 하지만 중개인도 그의 일을 하는 것뿐이니 잠시 집을 빌린 입장에서 협조할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친절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조가 비슷한 오피스텔이기에 다른 방을 볼 수 없으니 내 집을 보여주는 일도 있었다. 그가 손님을 끼고 와서 하는 말에서 알아챘다. 당일 연락 후 방문하는 일도 있었다. 부동산에서 씻는 도중 갑자기 방문해 벨을 눌러대는 날도 있었다. 화가 치밀었다. 나는 내 할 도리를 다하는 것 같은데 상대는 왜 날 존중해 주지 않는 거지?
문자가 왔다.
-오늘 집 보고 갈게요.
이젠 통보를 하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네"
"지금 집 보려고 하는데 집에 계세요?"
"없는데 지금은 어려워요. 그리고 당일 말고 하루 전에 연락 달라고 부탁드렸을 텐데요"
"아~ 손님이 오늘밖에 안 된다고 하셔서 급하게 전화드렸어요"
"저희 집은 주거 공간이지 매장이 아니에요. 사람 사는 공간이라 사적인 물건도 있는데 방문 일자랑 시간 먼저 조율해주셨어야죠. 안 돼요"
"죄송해요~ 앞으로 미리 연락드릴게요"
능구렁이 아주머니는 내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약속을 잘 지키기 시작했다. 예전엔 고운 말이 가야 오는 말과 행동도 고운 줄만 알았는데 살아보니 딱히 아닌 것 같다. 고운 말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친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나 역시 실수를 했다. 중개인에게 집을 방문하겠다고 하고 헛걸음을 하게 만든 것이다. 서로 날짜를 착각한 탓이었다. 이런, 크로스체크가 생명인데. 나이 지긋한 어르신께 정중히 사과드렸다. 그도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나중에 기회 되면 일정 잡잔다. 이렇게 일단락되나, 이 집은 사진으로만 봤을 때 그렇게 구미가 당긴 집도 아니었고 그냥 패스할까 싶었다.
전화가 왔다.
"네"
"아까 그 집 있죠? 오늘 저녁에도 볼 수 있는데 보러 오실래요?"
"제가 퇴근하고 가면 00시쯤인데, 그때도 근무하세요?"
"근데 껌껌해서 괜찮겠어요? 낮에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 괜찮으시면 일단 가보려고요!"
"그래요, 그럼. 그럽시다"
"네 이따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퇴근 후 약속 장소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예상보다 40분가량 일찍 도착해서 동네 먼저 둘러보았다. 음, 역세권. 번화가는 아니지만 주변에 맛집 많고. 공원, 카페, 밥집 오케이. 갑자기 출출해졌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터라 허기졌다. 엄마한테 밥은 먹었냐고 전화가 왔다. 아직이다. 이제 먹을거다. 순댓국집을 발견했으니까. 맛집으로 보였다. 날이 좀 쌀쌀한 터라 뜨끈한 국물이 땡겼다. 밥 한술 크게 뜨니 소주가 땡겼다. 이미 주변 아저씨들은 한 잔 기울이고 있었다(사실 나도 아줌마ㅠ). 하지만 나는 맨정신에 집을 살펴야 했으므로 참았다. 내가 이 동네 살면 이 집 자주 오겠군 싶었다. 과장하자면 느낌이 왔다. 터 무시 못 한다.
약속 시간이 되자 양복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백발의 신사가 등장했다. 앙증맞은 크로스백을 메고 계셨다. 바르고 올곧게 서 있는 태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이래서 다들 갖춰 입고 다니는구나, 이래서 짝다리 짚지 말고 턱 괴지 말라고 하는구나. 그는 유창하게 집소개를 해주고는 현란한 말솜씨로 나를 홀렸다. 아차차, 확인할 건 해야지. 물도 내려보고. 창은 잘 열리는지, 이것저것 부지런히 확인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고장 난 부분도 있지만 큰 흠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역까지 걸었다. 보통 집 보고 바로 헤어지지 않나? 역세권임을 어필하는 건가? 그는 정말 이 집이 괜찮다고 한다. 왜 괜찮은지 설명해 주겠단다. 치안 훌륭. 집주인 건실. 전체적으로 동네 우수. 들어보니 틀린 말은 없었다. 그는 마치 주문을 외듯 속사포로 그 집의 장점에 대해 늘어놓았다. 내 가늘게 뜬 눈이 동그래지는 시점이었다. 또 티키타카가 어찌나 잘 맞는지 친할아버지 같았다. 확인, 또 확인하는 내 질문 공세에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되려 내가 지쳤다. 강적을 만난 것이다.
"와 저 진짜 다 여쭤봤어요. 근데 실례지만 왜 이렇게 말씀 잘하세요?"
"내가 법조계에서 일했어요. 부동산 중개업도 한 지 한참 됐어. 내가 허튼 말하고 그럴 사람 아니에요. 이거 해서 얼마나 번다고? 작은 방 하나 거래한다고 수수료 얼마 안 돼요"
"그럼 마지막으로 여쭤볼게요. 손녀라고 생각해도 추천하세요? 사회초년생한테는 큰돈이란 말이에요!(하수처럼 발끈)"
"그럼 그럼~ 물론이지. 내가 한 말 뭘로 들었어요. 다시 설명해 줄게"
"아, 아니에요! 제가 결정하면 빠르게 연락드릴게요"
그가 실제로 나를 손녀로 생각했을 리는 없지만, 나는 그에게 완전히 설득당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로 계약하겠다는 연락을 보냈다. 노련함이란 이런 것인가...무엇보다 계약한 집 근처에서 먹은 순댓국 집도 참 좋았다. 슴슴한 국물 맛에 소란스럽지 않은 분위기까지.
새 집을 새롭게 꾸릴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 이전 편에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