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리도 철학과 함께라면 "있어 보이게" 됩니다
어떤 개소리는 개소리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매력적으로 들린다.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는 매력이 느껴지고, 일관되고 흥미 있게 보인다.
그러한 근원적인 차이는 어디서 올까?
나는 철학이 말의 힘을 강화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철학의 쓸모를 다시 써보자.
당신의 말과, 글. 결정 그리고 주변 사람을 다루는 태도까지.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철학들은 당신을 있어 보이게 그리고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동시에 그걸 더 낫게 만들기도 한다.
철학은 정말로 쓸모없는가?
한 때, 학문의 왕이라고 불렸던 철학의 위상은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밈으로 대변된다.
취업 안되고, 뭐 해야 할지 모르는 학과. 이러한 인식의 근간에는 철학의 비생산성이 자리 잡고 있을지 모르겠다. 배부른 시기에 철학이 발전했다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처럼, 노예들이 모든 일을 대신해 주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할 일이 없기에. 그들이 철학을 했다는 식의 인식이다. 나도 동의한다. 철학은 비생산적이다. 물리와 수학 등의 학문들이 그나마 생산적인 것과 다르게 철학은 비생산적일 수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이 없고, 질소비료가 없고, 인터넷이 없다면 살아가기 불편해지고, 생산성이 떨어지지만, 철학이 없다고 해서 삶을 살아가데 크게 지장이 생기지는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철학이 우리 삶에 쓸모없는 질문을 던진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를 대변하는 그림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평온한 일상, 그리고 행복에 대뜸 나타나 질문을 던지고, 당신의 삶을 우울증으로 가득 찬 비관주의적으로 만들어버리는 학문. 그것 역시 철학에 대한 하나의 인식이다.
이 모든 것은 철학이 "그냥"이라고 불리는 것에 이유를 찾아가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자들은 정신병에 있다는 말에 적극 공감하는 바이다. 하지만 철학이 없다면, 우리는 왜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성을 잃게 된다. 속력은 있으나, 방향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왜 살아야 할지... 근원적인 질문들에 철학은 대답한다.
현대 철학으로 들어오면, 철학은 매우 지루하고 현학적이다. 그렇기에 현대에서 철학은 찬밥통 신세다. 이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 "그냥 죽어"라는 것이다. 그냥 죽어라는 밈은 결코 단순한 현상이 아닌, 사람들이 철학을 포기하고, 그냥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원인에는 현대철학이 재미없어졌다는 것도 있다. 현대 철학의 경우에는 분업의 학문이 되어, 학술장이 세분화되었고 미세한 주제를 깊이 파는 논의가 많아졌다. 그러기에 우리와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철학은 지루하고 허망한 학문이 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학의 핵심 업무, 개념을 규정하고 전제를 점검하며, 논리적 정합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철학을 다시 들여다보면, 그럼 죽어와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하는 방법론의 정수가 있다.
철학을 정보가 아닌 도구로 접근하면, 새로운 지평이 열려나간다. 도구가 현학적이고 지루하지어도, 망치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지 아니한다.
철학은 근원적으로 당연한 것들에 대하여 질문들을 던지며, 우리의 평온한 일상을 사유의 장으로 만들어간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냥"이라는 표현을 남발한다. 원래 그렇게 해왔으니까,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방어기제 뒤에 숨어서, 나의 행동을 방어하곤 한다. 철학은 이 '그냥'을 공격하여, "정말 그래야 하는가? 그 가정의 근거는? 다른 생각은 없는가?" 묻는다. 이 질문이 쓸모가 되는 순간에, 우리의 생각은 한 단계 진화하여, 당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결정에는 방향과 기준이 만들어진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에게 질문을 던진 사례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왜 살아야 하는가? -> 실존주의 철학.
왜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은 나쁜가? -> 사회철학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 존재론
이런 식으로 철학들의 분류는 사실, 당연함에서 시작하곤 한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들, 혹은 너무나 개소리로 들리는 것들에 합당하고 논리적인 이유를 붙여서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철학"이다.
의대 진학을 꿈꿨던 학생과 컨설팅을 진행했던 내역을 토대로 한번 철학의 힘에 대해서 알아보자.
한 학생이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의사가 되고 싶은 이유를 나는 물어보았다. 그 학생은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의사가운 간지 *되잖아요" 당연히 이대로 생활기록부에 기재할 수는 없으니까, 여기에 철학, 혹은 역사에 대해서 붙여보기로 했다.
그럼 의사 가운이 왜 흰색일까요? 흰색인 이유는 오염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에 미생물학이 발전한 시기는 아니라서 세균의 존재는 몰랐지만, 의사들은 그때부터 경험적으로 오염은 환자를 질병에 걸릴 확률을 늘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염을 줄이기 위해서 흰색 가운을 도입했던 것이죠.
물론 사실이 아닌 부분도 많이 있다. 그때 당시 의사들은 빠르고 수술에 사람들을 참관시킬 정도로 간지에 죽고 간지에 죽이는 사람이었다. 수술에 사람을 참관시킨 이유는 자신의 수술실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고, 그러한 과시가 이어졌다. 그래서 매우 지저분한 환경에서 수술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자신의 수술실력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런 세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오염의 원리에 대해서 밝혀내고 흰색 가운을 입기 시작한 것인 만큼, 의사에게 흰색 가운의 의미는 대단한 것이다. 요즘은 오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 흰색가운을 입지 않는다. 수술실만 봐도, 초록색 소독가운을 입고 수술을 하러 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흰색가운하면 의사를 떠올린다. 의사가 멋있는 이유는, 의사의 흰색가운이 멋있는 이유는 오염하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 집념이 숨어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그냥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철학이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던 이유는 그가,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에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I가 등장하면서 AI는 점점 사람의 역할을 침식해나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왜 해야 하는가? 이 명확한 방향성이 없고, 방향성을 제시할 수 없고 따르는 사람들일수록, AI에게 대체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외에도 AI가 이제 모든 것들을 대신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역할은 모호해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세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나만의 철학을 갖고, 방향성을 제시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AI시대로 변화될 세상의 세분화이다. 인터넷이 세상을 하나로 엮어서 우리가 모두 하나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줬지만, AI는 이렇게 하나로 합쳐진 인터넷을 다시 여러 개의 개인화된 단위로 쪼개어나가고 있다. 수많은 정보가 다시금 생산되고, 개개인에게 맞춰진 수많은 정보들이 재생산되어 제공되고 있다. 또 하나는 알고리즘이다. AI를 통해서 만들어진 알고리즘들은 개개인을 하나의 사고 프레임에 가두어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릴스를 넘기면서, 쇼츠를 넘기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춰진 것을 읽어나가게 된다.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어떤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어떤 일상 윤리를 따를 것인가? 와 같은 질문들은 더 이상 학술 호기심으로 남아있던 분야에 갇혀있지 않다. 이것은 살아가는 기술의 문제가 된다. 철학은 여기서 판단의 기준점을 제공한다.
개소리에 철학을 붙여라, 그러면 있어 보이게 될 터이니.
요즘의 시대는 실제로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셀프 PR 할 때, "있어 보이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를 일컫는 단어가 "있어빌리티"이다.
혹자는 이 있어빌리티에 대해서 무시하고, 이를 그만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나고,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을 판단해야 한다. 그 관점에서 이러한 "있어빌리티"는 상당한 중요한 역량이 된다. 그 부분에서 철학은 허세를 줄이고, 망상을 줄이면서도 나를 포장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준다. 그냥 멋져 보이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준점을 제공한다. 질문들에 "그냥"이 아닌,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이러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약, 업무에 있어 이런 대화가 있다고 해보자.
" 이 기능은 그냥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하면 당연하게도 우리는 생각을 할 것이다. 왜? 그리고 저 기획안은 거절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철학을 붙여서, 다시 써보자.
"우리의 서비스는 사용자의 시간을 절감하는 핵심 가치를 갖고 있어요. 이를 통해서 사용자 편의성을 확대하여,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애플리케이션이 되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기능은 유저가 사용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에 개발할 수 있어요"
이렇다면, 같은 기능 A에 대한 개발을 새롭게 작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진짜 개소리는 개소리고, 모든 이상한 이야기들을 철학을 통해서 커버 치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붙이기가 허세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철학은 말에 근거와 구조를 부여하여, 허세를 검증가능하고 반박가능한 주장으로 만든다. 그렇기에 있어빌리티는 포장의 기술이 아니라 논증의 윤리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논증의 구조는 사고의 흐름과 프레임을 만들고, 이는 일상적인 태도가 되어야 한다.
철학은 개소리를 구원한다. 그냥(JUST)를 멈추는 순간 철학이 시작된다. 철학은 말을 화려하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말을 책임지고, 내 생각을 담은 말을 내뱉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철학은 당신을 있어 보이게 만듦과 동시에, 실제로 있게 만들어줄 것이다.
부록(GPT를 사용하여 작성함)
왜 살아야 하는가? → 실존주의(자유·책임·부조리) → 의미는 주어지지 않고 스스로 창조된다;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 삶의 형식. → 사르트르(“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카뮈(『시지프 신화』)
신은 존재하는가? → 신존재 논증/비판, 칸트 비판철학 → 이성의 이론적 한계로 증명 불가, 다만 도덕을 위해 실천이성의 가정으로 가능. → 아퀴나스, 흄, 칸트(『실천이성비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합리론/경험론/칸트 종합 → 경험은 선험적 형식과 범주로 구조화된다; 판단의 조건이 곧 인식의 조건. → 데카르트·흄·칸트(『순수이성비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선인가? → 공리주의 vs 권리·의무론 → 효용 극대화는 권리 침해 지점에서 한계; 제약된 공리주의·롤즈의 두 원칙 등으로 보완. → 밀·싱어 / 칸트·롤즈(『정의론』)
자유란 무엇인가? → 소극적 자유 vs 적극적 자유 → 간섭 부재와 자기 지배를 구분하고, 긍정 자유의 전제주의 위험을 경계. → I. 벌린(「자유의 두 개념」)
법은 왜 지켜야 하는가? → 자연법 vs 법실증주의 vs 해석주의 → 유효성과 정당성을 구분; 법의 내재적 도덕성·원칙 중심 해석을 통해 부당한 법에 저항 기준 마련. → 하트·풀러·드워킨
민주주의=다수결인가? → 숙의민주주의 → 정당성은 공론·이유 제시 절차에서 나온다; 다수결은 절차의 일부일 뿐. → 하버마스, 거트만·톰슨
언어는 현실을 투명하게 비추는가? → 후기 비트겐슈타인, 구조/해체 → 의미=사용; 차연·맥락·권력에 의해 의미가 흔들린다. →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과학은 사실의 중립적 누적인가? → 쿤·라카토스·파이어아벤트 → 과학은 패러다임과 연구프로그램의 전환을 겪는다; 관찰은 이론부하적. → 쿤(『과학혁명의 구조』)
자아는 통일적 실체인가? → 무아·번들 이론·인지과학 → 자아는 과정/내러티브적 구성이다. → 불교 아비달마, 흄, 데이트
역사는 필연적으로 진보하는가? → 헤겔/마르크스 vs 푸코/포스트모던 → 단선적 진보 신화 비판; 권력–지식의 계보학. → 푸코(『감시와 처벌』), 리오타르
예술의 가치는 아름다움인가? → 형식주의→개념미술·제도이론 → 예술은 제도/콘텍스트가 규정; 미적 경험은 하나의 축. → 뒤샹, 딕키, 아도르노
기술은 중립적인가? → 하이데거·위너(기술 정치성) → 기술은 세계를 드러내는 개시 방식이며, 설계에 가치/권력이 내재. → 하이데거(「기술에 대한 물음」), Winner(“Do Artifacts Have Politics?”)
도덕적 고려의 경계는 인간인가? → 동물/환경윤리 → 고통·생명·생태계를 기준으로 도덕권의 확장을 정당화. → 싱어, 레건, 네스
프라이버시는 사적 편의인가? → 정보윤리·맥락적 무결성 → 프라이버시는 개인 편의가 아니라 권력 비대칭을 제어하는 사회적 인프라. → 워렌·브랜다이스, 니센바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