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청회가 화기애애하게 끝나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지만 권세진의 발언으로 공청회장 분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그의 발언을 끝으로 사회자는 부리나케 공청회를 마무리지었다. 무대 위 사람들이 떠나가고 무대 왼편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애써 굳은 얼굴로 꾹꾹 눌러가며 빠르게 공청회장을 빠져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운곡시장 상인회 중 두엇이 희미한 곡소리를 내어놓자 때를 맞춘 듯 행사장 불이 꺼졌다. 그 모습을 무대 뒤편에서 바라보자니 나는 어쩐지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어간 은옥 아주머니의 장례식에 와 있는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울고 있는 낯익은 얼굴들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수 십년동안 함께 같은 시장에서 장사를 해 오던 동무같던 은옥 아줌마를 시장 밖으로 쫓아내듯 몰아낸 것도 모자라 아줌마의 장례식에는 기웃거리지조차 않던 그들이 지금은 시장을 잃게 될까봐 눈물을 흘리며 걱정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고 두눈 가득 경멸이 차오르는 것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애써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덕구야, 왜 그래.”
곁에 앉아있던 고보영이 조심스레 내 팔을 흔들며 물었다. 요즘 들어 부쩍 둘이 있을 때면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이다.
“응? 아, 아니야. 이제 가자.”
“엄마랑 춘수 삼촌한테 인사 안하고? 우리 온 걸 못 본 것 같은데. 가보자.”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왜?”
“응?”
내 물음에 당황했는지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리 지금 일하러 온 거잖아. 그리고 너가 뭐하러 저 두 사람한테 인사를 해.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무슨 말이야?”
나의 가시 돋은 말투에 그녀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운곡시장 상인들 틈바구니에서 박춘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상인 몇몇과 모여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그가 운곡시장에서 물건을 사 본 적이라도 있을지 궁금해졌다. 생각이 그곳에 미치자 그 무리 속 박춘수의 모습은 괴이하리만치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는 어디에서든 이방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팔자를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속한 세상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행사장 밖으로 나섰다.
군민위원회든 권세진과의 대화에서든 언제나 몸을 낮추어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야 할 때를 끈질기고 집요하게 기다리던 박춘수의 평소 모습과 달리, 오늘 그가 마지막 발언에서 보여준 모습은 낯설었다. 시종일관 박춘수의 질문에 심드렁한 표정과 알맹이 없는 답변으로 일관하던 무대 위 세 사람의 태도에 부아가 난 것이라고 하면 조금은 설명이 되려나.
“야! 이덕구, 너 지금 뭐하는거야.”
뒤따라오던 고보영이 내 오른팔을 잡아채 듯 움켜쥐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뭐가?”
성난 그녀의 얼굴을 보자 내내 머릿 속 잔상으로 맴돌던 박춘수와 권세진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금껏 보아왔던 그녀의 모습 중 오늘이 제일 무서웠다. 그녀가 화가 나서 무서웠다는 뜻이 아니라, 그 표정이 절망에 가까운 것이라 그 모습을 마주하며 서 있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 팔을 잡은 채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끌려 군청 건물 밖으로 나갔고 그대로 주차장까지 갔다. 차에 다다르자 그녀는 나를 밀어넣듯 조수석에 태우고는 자신은 운전석에 재빠르게 올라탔다.
“아까 그 말 무슨 뜻이야?”
“무슨 말?”
나는 안전벨트를 매며 대꾸했다. 그녀가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나를 차로 끌고 왔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그녀의 표정을 마주 보는 것이 두려워 무엇이라도 해야할 것만 같아 안전벨트를 맸다.
“이제 신경 안 써도 된다니? 왜 자꾸 남 취급을 하는데?”
“그럼 남이 아니고 뭔데.”
가위에 눌린 것처럼 내 표정, 말, 행동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절망하듯 주저앉던 방금 전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게 화가 잔뜩 난 그녀의 모습은 생기마저 넘쳐보였고 나는 그 낯선 얼굴이 그녀의 웃는 얼굴만큼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생뚱맞은 마음을 그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남이 아니고 뭔데? 남이 아니고 뭔데! 그래! 이제부터 그럼 남 안해! 나, 남 안해! 안할거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목부터 귓불까지 벌개져서 내게 악을 쓰듯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코 그녀의 말에 겁이 나는 것도 아니건만 심장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화를 삭이는지 말문이 막힌건지 이렇다 할 다음 말이 없던 그녀를 향해 나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그럼…”
“사귀자. 그럼 되잖아.”
그녀가 빨랐다. 내가 하려던 말이 그녀와 같은 것은 아니었으나 해야할 말을 들은 것 같은 청량함에 머리가 맑아졌고 심장은 두 동강이가 날 것처럼 터질 듯 박동쳤다. 나는 한참만에야 내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늘고 조용하고 길게 숨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지금 이 순간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해 설명하려는 찰나 편집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고작 반 년을 남겨둔 내 계약기간도 떠올랐다. 그녀의 한껏 상기된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이 두 가지를 떠올렸다는 사실에 나는 한없이 비참해졌다.
“…안돼.”
“안돼는 거 안돼!”
힘없이 건네는 나의 말을 그녀가 강하게 받아쳤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널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네가 그 낡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나를 보고 활짝 웃던 그 순간부터 어쩌면 나는 너를 좋아하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녀가 오해하도록 두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비겁한 방법을 택했다.
“편집장님이 연애는 안된다고 하셨어.”
그녀가 눈물을 쏙 거두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가? 언제?”
“너 사무실에 나오기 시작할 때 즈음. 그리고 난 …이해해.”
이번에는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덕에 나는 아래를 향한 그녀의 이마와, 속눈썹과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모습까지도 마음껏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읊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짜 나빠.”
그 짧은 말에 마음이 아팠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더욱 분명하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들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핑계대는 것도 나쁘고, 이해한다는 말은 더 나빠. 넌 진짜 멍청한 놈이야.”
줄곧 나를 향해 앉아있던 그녀는 몸을 정면을 향해 고쳐앉았다. 그녀의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또르륵 또르륵 타고 흘렀다. 그녀는 운전대를 잡고는 시동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떨구듯 두 무릎 위로 팔을 늘어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숨과 함께 마지막 말을 토해내고 차문을 열어 뛰쳐나갔다.
“그래도 좋아해. 멍청한 놈아. 넌 진짜 미련하고 멍청하고 나쁜 놈이야. 먼저 사무실에 들어가. 나는 혼자 갈거야.”
“고 주임은?”
사무실에 홀로 들어서는 나를 보며 김 실장이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편집장이 끼어들었다.
“아, 나한테 연락왔었어. 몸이 안 좋다고 퇴근한다더라. 이 대리, 많이 안 좋아보이든?”
편집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 좀 피곤하기도 하고 컨디션이 안 좋아보이기는 했어요. 쉬면 좋아질 것 같다고.”
편집장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알았다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자리로 돌아갔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나는 오늘의 공청회 기사를 쓰기 위해 몇 번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한 글자도 나가지 못하고 텅빈 모니터 화면만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평소대로 그냥 행사가 열렸다 수준으로 마무리해야할지 아니면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써야할지 도무지 분간이 되질 않아 편집장에게로 갔다.
“저, 편집장님. 오늘 공청회 건 말인데요.”
“응응, 그거 영 뭣하면 안 써도 돼. 군청 추계행사하고 저번에 서울에서 대학생들 와서 초등학교 몇 군데 돌고 간 거 있지? 그것만 써도 돼.”
“네, 그럼 공청회는 좀더 생각해 보고 써도 될까요?”
편집장이 줄곧 모니터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뭐, 안 써도 된다니까. 정 쓴다고 하면 그냥 간단하게 써도 되고. 그런데, 안 써도 돼. 내 말 알았지?”
안 써도 된다는 말 뒤에 어떤 뜻이 숨어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군청 추계행사와 대학생 교육활동 기사를 서둘러 마무리짓고 퇴근 시간에 정확히 맞춰 사무실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서서 핸드폰을 꺼내보았다. 고보영을 그렇게 보내고 난 뒤 일부러 핸드폰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터라 무슨 메시지라도 와 있지는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아무 연락도 없었다. 다만 엄마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한 통화 와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넣고 마침 도착한 버스 위에 올라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나 왔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소리에 안방에 있던 엄마가 거실로 나왔다.
“밥은, 안 먹었겠네. 같이 먹자.”
엄마가 시계를 보며 말하고는 느리게 걸음을 옮겨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밑반찬 서너 개를 꺼내어 늘어놓고는 아침에 먹었던 콩나물국에 불을 올리며 말했다.
“옷 갈아입고 나와. 밥 먹게.”
방에 들어가 나는 가방도 벗지 않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얼마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식탁에 수저가 놓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듯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는 거실로 나섰다. 엄마는 먼저 한 술을 뜨고 있었다.
엄마 맞은편으로 가 자리를 잡은 나는 가볍게 한술을 떴다. 별다르게 잡곡을 섞지도 않았건만 밥알이 입안에서 까슬댔다. 나는 얼마 되지 않는 밥알을 가까스로 목구멍으로 밀어넣고는 이번에는 콩나물국을 한숟가락 뜨며 말했다.
“나, 오늘 공청회 갔었어.”
“기사 썼어?”
엄마가 자못 놀란 얼굴로 물었다. 운곡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면서도 묻지 않고, 알면서도 말하지 않던 우리 두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시장 이야기를 두고 말을 꺼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엄마 입에서 다른 말이 나왔어야 자연스러웠다. 이를테면 ‘너가 듣기에 공청회 어떻든’이라든지, ‘너 편집장이나 여기저기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 좀 없냐’라는 말들 말이다. 그런데 대뜸 기사를 썼냐고 물으니 당황한 건 내쪽이었다.
“무슨 기사? 공청회? 아니, 안 썼어.”
엄마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나를 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전화했었어. 너 기사 쓸까봐, 박춘수 씨하고 이야기하고 쓰라고 하려고.”
엄마 입에서 ‘박춘수 씨’라는 말이 나오자 그 모습이 너무나도 생경하여 나는 생각조차 멈춘 채 엄마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런 나의 침묵을 엄마는 다른 뜻으로 오해했는지 다시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까 너 나가는데 박춘수 씨가 매일홍영에서도 왔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홍영에서 우리 이야기를 좀 기사로 써 주면 어떨까, 뭐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박춘수 씨가 너하고 이야기 해 보겠다고 해서. 나는 너가 그 전에 기사 쓸까봐 전화했지, 뭐. 아직 연락온 건 없어?”
“엄마...기사는 그게 좀 어려울 수도 있고, 잘은 모르지만.”
이번에는 엄마가 나의 말에 생각이 멈춰버린 듯 했다. 나는 편집장 이야기를 하려다 마음을 바꾸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그러지 말고 우리도 거기 우선 상가분양, 그거 한번 알아보면 어때?”
“응?”
엄마는 수저도 내려놓고 식탁에서 두 손마저도 내려버렸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러움이 북받치는 얼굴이었다. 어쩌다 보니 하루만에 사랑하는 두 여자를 모두 울리고 말았다.
“엄마, 울지 말고 잘 들어봐. 엄마도 손님 유치하기 힘들고, 여기 저기 카페 다니면서 영업하는 게 쉽지 않다며. 거기 상가건물에는 사람들도 많이 드나들거고 엄마과일이야 워낙에 물건이 좋으니까, 사람들이 오기만 하면 이제 이런저런 걱정 안해도 되잖아.”
“다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우선 상가분양권, 그거 한번 알아보자고. 나도 같이 알아볼게.”
“그리고…들어간다고 치자, 거기 임대료도 비쌀텐데 무슨 수로 감당하려고.”
말을 들어보니 엄마도 고민을 안해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엄마, 돌아가신 분 이야기해서 좀 그렇긴 한데. 은옥 아줌마, 그때 시장 나가고 나서 거기 그 상가 입지가 좋아서 장사도 잘됐다며. 엄마도 그럴거야. 장사 잘될거야. 걱정하지마, 한번 해 보자. 어차피 지금도 장사가 잘되는 건 아니잖아.”
“너도 아까 그 무대에 있던 그 안경 낀 남자, 그 마지막에 말했던, 그 사람하고 생각이 같은거야?”
같은 생각이라고 해야 하나, 같은 생각이라는 게 싫다고 해야 하나. 그런 말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소용인가. 질 게 뻔한 전투에서 싸우느라 진 빼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돌려서 해야 하나. 한꺼번에 많은 생각들이 달겨들어 머릿 속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의 답을 기다리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어. 그런데, 그 박춘수 씨하고 이야기는 한번 해봐.”
“엄마.”
이제 밥 한 술을 겨우 떴을 뿐이면서 자기 밥그릇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엄마를 불러세웠다. 엄마가 힘없이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박춘수 씨는 어쩌다가 거기에 가서 그러고 있는거야?”
오늘 하루 중에 가장 진심이 담긴 말을 내뱉고 나는 엄마의 답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원하는 대답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다만 순전히 궁금해서 물은 말이었지만 나는 엄마의 대답이 내게 또 생채기를 내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러게. 몰라. 그냥 어느 날 찾아와서, 자기도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하고 싶다고 했어. 그냥, 갑자기 찾아와서.”
‘집이에요?’
박춘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핸드폰을 엎어놓기가 무섭게 답장이 왔다.
‘응, 올래?’
‘네, 지금 갈게요. 집이에요. 괜찮아요?’
‘응, 와라.’
오랜만에 박춘수와 마주 앉았다. 마땅한 이유도 없이 서로를 잃은 채 한 계절을 보낸 우리였지만 어색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맞은편 그를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만나지 않았던 시간동안 그를 생각하지 않은 적 없었고, 슬며시 미워질 때도 있었지만 소중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었다는 것을. 어느 날 내 인생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온 이 낯선 이방인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그 순간 나는 잔잔하고 명료하게 깨달았다.
“오랜만이다, 얼굴 보니까 좋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수줍음이 밀려들어 나는 고개를 숙였다.
“혹시 어머니께 이야기 듣고 온 건가?”
나는 이번에는 얼굴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쉽지 않겠지? 매일홍영하고는 톤이 다른 기사가 될 수도 있으니까. 보통은 공청회했다, 정도로 끝나지 않던가.”
“저도 고민은 했어요. 어떻게 써야할지. 그런데 편집장님은 안 써도 된대요.”
“쓰지 말라는거네.”
박춘수의 말에 편집장의 얼굴을 떠올랐다. ‘알았지’라며 묻던 그 표정의 의미가 쓰지 말라는 것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겠죠.”
우리 사이에 짧은 침묵이 이어졌고 박춘수가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향하더니 탄산수 두 병을 꺼내와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번에 사온 쿠키 맛있더라. 고맙다, 잘 먹었다는 말도 못했네. 현관에 매달아져 있길래 나는 또 누가 나 좋아하는 줄 알고. 하하.”
힘없는 그의 농담에 우리 두 사람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먼지처럼 풀썩 날렸다 금세 주저앉았다.
“그런데, 운곡시장 상인들 모임에는 왜 나가는 거예요?”
엄마에게 했던 물음을 이번에는 박춘수에게 던졌다. 그가 탄산수 병을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글세, 나한테도 중요한 일이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던 그의 존재와는 별개로 그가 가볍게 건넨 그 한 마디에 나는 슬며시 화가 났다.
“왜 중요한 일인데요? 운곡시장이 없어지고 말고가 왜 중요한데요?”
내 목소리에서 감정을 읽었는지 박춘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림처럼 고요히 멈춰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운곡시장이 없어지든 앞으로 100년을 더 가든, 그게 내게 중요한 건 아니야. 오해없었으면 해.”
그에게도 운곡시장이 중요하다며 내 멋대로 오해해서 화가 난 것도 모자라, 나는 운곡시장이 있든 말든 그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그의 말에 서운함까지 더해지고 말았다.
“그럼 왜 시장사람들을 돕는건데요?”
“내가 돕는다고 생각해?”
그의 물음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여전히 그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온기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럼 뭔데요?”
그는 나를 향해 바른 자세로 고쳐앉으며 깍지낀 두 손을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내가 뭐라고 시장 사람들을 지키겠냐. 그냥 나하고 동기와 이익이 맞는 것 뿐이야. 나를 물먹인 놈이 누군지 알고 싶을 땐, 내가 물 먹어서 이익을 보는 놈을 찾으면 된다. 그런데 가만 보니 BH개발이더라. 그 정도 공사규모를 수주할 수 있는 곳은 홍영에서 BH개발 밖에 없어. 유복환 회장 정도의 지역유지라면 군수 구워삶고, 도시계획공사 임원들 몇 명 구워삶아서 자기 이익 취하는 건, 뭐,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그런데 나쁜 짓은 그들이 했는데 손해는 내가 봤어. 그리고 가만 보니 유 회장 소원 이루느라 손해 보는 게 나만 있는 게 아니더라. 그 건물 들어서면 운곡시장도 와해될거야. 그래서 찾아간거야. 그런데 내가 유 회장하고 어떤 인연인지, 그 건물이 들어서는게 왜 싫은지 말씀드릴 수가 없잖아, 시장 분들한테. 그래서 그냥 나도 저 건물이 들어서는 게 싫다고 했어. 그런데 모르겠다. 상인 중 몇몇은 이미 우선 상가분양권 알아보고 로비하느라 하 사장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다고 그러더라. 그게 걱정이 되긴 하는데….”
“어떻게 같아요?”
“응?”
“어떻게 형이랑 시장사람들이랑 상황이 같냐고요.”
“덕구야…”
“손해를 봤다고요? 저번에 인생이 고꾸라졌다고 했죠? 진짜 고꾸라질 것같은 사람은, 다시 일어날 방법이 없는 사람은, 복수할 시간도 없어. 다음 살 길을 궁리해야해요. 우리 엄마는 공청회 간 자리에서도 상가분양을 신청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그게 유리한지, 거기 들어가면 임대료를 감당은 할 수 있을지, 그런 걱정을 같이 한단 말이에요. 그냥 내 인생에 걸림돌 된 인간이 원하는 거 이뤄지는 꼴 못 본다, 그런 수준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뭐가 같아요? 시장 사람들이 우스워요? 알잖아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머리에 띠 두르고 군청 앞마당에서 목이 터져라 외쳐봤자 뭐가 달라지는데요? 권세진 말처럼 상황이 달라졌는데 살 궁리부터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요!”
“네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네.”
“내가 뭘요?”
“그 일련의 일들이 나한테 얼마나 힘든 일들이었는지, 그게 얼마나 상처로 남았는지 넌 모르잖아. 그리고…”
“말해준 적도 없잖아요! 막말로 그 건물이 들어선다고 해서, 형한테 무슨 해가 있는데요? 거기 가서 쇼핑하지 않겠어요? 아니, 홍영에 계속 살기는 할거예요?”
“덕구야, 그만하자.”
“아니요, 말 나온 김에 할래요. 그만하세요. 시장 상인들 들쑤시는 거 그만하라고요.”
“홍영 건물 대다수가 유복환 거라면서. 그 사람은 거기 건물 안 들어서도 상관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시장사람들은 다르잖아. 할 수 있는데까지는 막아봐야하지 않겠냐? 그리고 그게 비리라는 게 드러나면 공사도 지속하지 못할거야. 내가 당한 일을 알릴 방법만 생각해 보면…”
“그만하라고요. 그냥 서울로 돌아가요.”
그 순간 소리가 들렸다. 박춘수의 말을 잃은 표정이, 그의 마음이 발 아래 마른 낙엽처럼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박춘수의 얼굴을 바로 보는 것이 견디기 힘들어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기에서 살 사람들은 우리라고요! 어차피 박춘수 씨는 여기에서 계속 살 생각도 없었잖아요. 아니에요?”
나는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눌러가며 뚜벅뚜벅 현관으로 향했다. 내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잡으려는 찰나, 등 뒤편에서 박춘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있었어, 살 생각.”
(다음 주 월요일, 37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