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었다.
35화. 당당한 그의 태도에 우리는 할 말도 잃고 희망도 잃었다.
‘열린 도시재생을 위한 시민공청회’
공청회가 열리는 군청 대강당 무대 위 현수막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짙은 남색의 조끼를 맞춰입은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의 등에는 ‘운곡시장 상인회’라고 적혀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표정과 차림새로 그들이 마음에 새기고 벼르며 온 말들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알아서 구역을 나누어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앉아있었다. 한 무리는 맨 앞에서부터 너댓줄까지 군청 공무원, 공공기관 관계자, 지역유지 등이었다. 무대를 중심으로 왼편에 앉아있는 무리는 새로운 쇼핑몰, 즉 군청에서는 ‘새로움터 부지 예정건물’이라고 부르는 그 건물 인근에 있는 신축 아파트 주민을 주축으로 쇼핑몰 건립을 찬성하는 이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무대를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쇼핑몰 건립을 반대하는 운곡시장 상인 중심의 무리였다. 나처럼 쉬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여 자리를 정할 수 없는 사람이나, 고보영처럼 반대는 하지만 드러낼 수 없어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부류들은 맨 뒷줄에 자리를 잡았다.
안경을 쓴 깡마른 남자가 대강당 앞문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와 여자 각 한 명이 따라들었는데, 여자는 다급히 연단으로 향했고, 남자는 그 깡마른 남자가 맨 앞줄에 있던 사람들 몇몇과 악수를 나누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뒤, 그가 자리에 앉자 자신은 그 뒷줄로 가 군수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연단으로 향했던 여자는 마이크를 들어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행사의 시작을 알렸고, 구태영 군수를 비롯하여 앞줄에 앉은 몇몇을 지루하게 소개한 뒤 그 ‘새로움터 부지 예정건물’에 대한 추진 배경, 경과, 향후 계획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내용은 박춘수가 들려주었던 것에서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었고 다만 박춘수의 예상처럼 그 ‘예정건물’이라 불리는 쇼핑몰 건립은 현재 입찰 진행 중으로, 지난번 입찰에서는 단독업체 응찰로 1회 유찰이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다음번 입찰에서도 단독업체가 참가하여 이 역시 유찰될 경우, 해당 업체와 수의계약을 진행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결국 박춘수의 말대로였다. 다만 그것이 권세진의 말처럼 다른 지역에서 온 대기업에게 건설 기회를 주는 것보다 나은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자세히 말씀드리겠다던 그 연단의 여자조차도 그것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 도시개발국 이명훈 국장님, 이재우 주무관님, 그리고 한국도시계획공사 중부지사 권세진 과장님 연단으로 모시겠습니다.”
연단의 여자는 굳은 표정으로 강당 앞쪽에 모여앉아있던 세 사람을 호명했고 그녀의 소개에 따라 그들은 무대 중앙에 놓인 기다란 책상에 자기 이름이 적힌 명패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가운데 앉은, 안경을 쓴 그 깡마른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자료를 몇 차례 뒤적거리더니 연단의 여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고갯짓에 맞추어 그녀가 강당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아, 네, 본격적으로 질의응답, 의견개진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질의나 의견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고 자기소개를 해 주신 뒤,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반드시 발언기회를 얻으신 후에 말씀을 이어나가주시길 바랍니다. 네, 방금 손 드신 남자분께 마이크 가겠습니다.”
그는 박춘수였다. 사실 그는 연단의 여자가 ‘그럼 지금부터’라는 말을 꺼내놓기 무섭게 바르고 곧은 자세로 오른손을 위로 뻗어 들고 있었다. 박춘수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안녕하십니까, 현재 3기 행복군민위원회 동네활력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춘수입니다. 보시다시피 운곡시장비상대책위원회 자원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들어서게 되는 쇼핑몰 1층에 테마 쇼핑거리가 조성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성이 된다면 어떤 형태로 조성이 되며, 운곡시장과의 상생협력 방안은 마련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아울러 저 쇼핑몰과는 별개로 운곡시장 활성화 방안이 약 2년 전에 이야기되었던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진척이 없는 상황인데 그 활성화 방안은 아직 유효한지, 유효하다면 향후 계획은 무엇이고 폐기된 것이라면 왜 시장상인들에게는 적절한 설명조차 없이 폐기되었는지 답변 바랍니다.”
박춘수가 말을 마치자 무대 위 가운에 앉았던 깡마른 남자는 이재우 주무관에게 발언기회를 넘긴 후 오른손으로 턱을 몇 차례 쓸었다.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아 이재우 주무관의 말을 기다리는 엄마와 시장상인 몇몇의 뒷모습과 달리 그 깡마른 남자의 표정에는 어떠한 동요도 기복도 없었다. 마치 ‘이번 일정을 마치면 다음 일정이 뭐더라’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듯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실무를 맡고 있는 도시개발국 이재우 주무관입니다. 먼저 질문이 좀 많으셔서 간단하게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새로움터 부지 예정건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확정된 바가 없습니다. 다만 홍영 주민들의 편리한 문화생활과 쇼핑생활 그리고 지역기업의 매출성장을 돕기 위해 건물의 1층을 지역특산품을 비롯하여 청과, 수산, 채소 등의 품목을 정해 판매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할 계획이며 이 부분은 건설사가 확정되면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운곡시장 활성화 방안은 저희가 운곡시장으로 향하는 진입로 개량공사, 인근 주차장 확충 등으로 이미 수행 완료된 상태이고 운곡시장의 향후 발전방안은 금번 새로움터 부지 예정건물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상생협력방안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다 계획이군요. 그리고 말씀하신 진입로 개량이나 주차장은 운곡시장 자체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이 아니라 환경조성 정도로만 보이는데요. 그럼 생각하시는 상생협력방안은 뭡니까?”
이재우 주무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춘수가 파고들 듯 다음 질문을 이어나갔다.
“저, 다른 분께도 발언기회를 드려야하기 때문에 일단 다음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연단의 여자가 박춘수의 말을 자르자 그가 마이크 없이 큰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곳에 모이는 이유는 사회자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궁금한 것을 질의하고 그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기 위함인데 방금 제가 드린 질문에 대한 담당자분의 답변은 그저 미정이다, 계획 중이다라는 말 밖에는 없습니다. 이미 운곡시장 상인 일부 중에는 1층 상가 우선분양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는 상황이고, 이 부분은 입찰공고에 게시된 제안요청서상에도 나와있는 부분인데 왜 그 말씀은 하지 않으시는겁니까? 이미 군청에서 입찰하는 업체를 상대로 1층 상가의 경우 지역상인들에게 우선 분양기회를 주는 조건이라고 되어있는데, 운곡시장과의 거리나 쇼핑몰에 들어서게 될 취급품목을 고려할 때 운곡시장 활성화는 포기하겠다는, 아니 와해시키겠다는 계획으로 들립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신의있게 답변을 해 주셔야…”
“죄송합니다만 대담이 아니라 공청회이므로 다음분께 발언기회를 드리고 시간이 남으면 다시 발언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사회를 보는 여자의 한 마디와 함께 발언기회는 맞은편 무리의 어떤 남자에게도 돌아갔다.
“안녕하십니까, 현재 내과를 운영하고 있는 주은섭이라고 합니다. 보니 쇼핑몰에 의료시설도 들어선다고 하는데 저희같은 1차 병원도 건물에 입주 가능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임대료 혜택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박춘수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달리 주은섭 씨의 질문에 대한 이재우 주무관의 답변은 생각보다 구체적이었다. 이재우 주무관은 1차 병원이 연합하여 하나의 메디컬 클러스터를 만든다는 계획을 설명해 주며 때로는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이러한 대화의 패턴은 공청회가 끝날 때까지 줄곧 같았다. 한편의 질문에 대해선 구체적인 것은 정해진 것이 없다 했고, 다른 한편에서 물어오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기회들이 그들 앞에 펼쳐질 것인지에 대해 답했다. 공청회가 끝날 시간이 다 되어가도록 박춘수에게는 기회가 좀처럼 오질 않았고 연단의 여자는 박춘수를 잊었는지 아니면 애써 모른 척하려는지 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공청회를 이어나갔다.
“네, 그럼 예정된 시간이 다된 관계로 오늘 공청회는 여기까지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자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니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결국은 BH개발이 임대업을 하는데 나랏돈을 쏟아붓겠다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지금 쇼핑몰에 뭐가 입점하는지 궁금해서 모인 자리가 아닙니다! 운곡시장이 와해될 것이 뻔한데 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질 않는 겁니까!”
박춘수의 외침에도 깡마른 남자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서류들을 하나둘 천천히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국장님, 사회자님, 괜찮으시면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권세진이었다. 행사 내내 줄곧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뗀 것이다. 깡마른 남자는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놓으며 점잖게 권세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세진은 팔짱을 낀 채 마이크를 향해 몸을 숙였고 그 바람에 그의 안경알이 반짝 빛을 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뱀눈이 박춘수를 한번 훑어내고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질문해 주신 분께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곡해해서 듣지는 마시고요. 운곡시장 100년 됐지요. 오래됐습니다. 홍영의 유일한 재래시장 맞지요. 그런데 운곡시장 유동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수치로 말씀드리면 실감이 안 나실테니까 이렇게 말씀드려볼게요. 운곡시장 일주일 유동인구가 여기 군청 앞 횡단보도 하루 유동인구하고 비슷하거나 심지어 더 적을 때도 있습니다. 홍영에선 이미 인근도시 대형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사람들이 태반이라고 들었습니다. 홍영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바뀌고 있는데 운곡시장도 군청만 바라보고 있을 때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에 들어설 쇼핑몰 1층에 우선 상가분양을 받게 된다는 건 큰 기회입니다. 민간에서 상가분양하면 이런 기회 없지요. 이걸 잘 활용하시는 것도 저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100년 동안 존재했으니 앞으로도 존재하도록 나라가 도와라? 손님도 찾지 않는 시장을 왜 애써 살려야합니까?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홍영도 신축 아파트 들어서고 하면서 사람도 좀 많아졌고요. 인근 도시에 사람들 다 빼앗기면 지역경제 누가 살립니까. 변화는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적응해야하는 문제지요.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고요. 그게 자연 아닙니까? 군청도 지역경제 살려보겠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는건데 발전적으로 봐 주셔야죠. 그리고 운곡시장을 아예 포기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시장과의 상생방안을 고민하니까 쇼핑몰 1층에 대한 상가분양에 대해서도 우선권을 주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부분에 더 역점을 두셔서 비상대책을 세우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네요. 제 의견은 여기까지입니다.”
(금요일, 36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