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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마나 Oct 19. 2020

37화. 꽃처럼 사랑해 주면 안돼?

 “덕구야.”

 한참 출근을 서두르는데 엄마가 불러세웠다. 화장실에서 나와 수건으로 대충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털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나를 불러놓고도 다음 말을 쉬이 하지 못했다. 아들에게조차 못할 말이 어느새 저렇게 많이 생겼는지 마음이 쓸쓸하다.

 “덕구야, 그 우선 상가분양권인지 뭔지, 너도 듣게 되면 좀 알려줄래? 한다는 건 아니고 그래도 좀 알고는 있으려고. 어디에 말하지는 말고.”

 “알았어.”

 나는 짧게 대답하고 방으로 향했다. 엄마는 마주잡은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박춘수에게 모난 말로 내지른 지도 보름이 지났다. 먼저 연락하여 미안하다고 해야할지 그냥 흐르는대로 두어야할지 망설이다보니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 우연히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퇴근길 편의점에도 들러보고 아무도 없는 아파트 입구 벤치에 덜덜 떨며 앉아 기다려도 보고 괜히 아파트 복도에 나와 802호를 힐끗거렸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와 나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지던 그 많은 우연들이 이제 겨우 인연을 만들었건만 나는 이렇게 또다른 우연을 빌어 그를 보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번은 그의 집 초인종을 눌러볼까 아니면 연락을 해 볼까 수없이 고민해 보았지만 막상 하려했을 땐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아프게 한 나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니었노라 이야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언젠가 홍영을 떠나게 되리라는 내 생각은 사실 진심이었다. 

 옷을 차려입고 방을 나서자 엄마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내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자 엄마가 현관쪽으로 다가와 섰다. 

 “오늘 퇴근하고 시장으로 올래?”

 “시장에는 왜?”

 “오늘 시장사람들이랑 모여서 저녁 먹기로 했어. 맨날 모이는 할머니 족발집으로 오라고. 오랜만에 너도 보고 싶다고들 하고.”

 나는 ‘박춘수 씨도 와?’라고 물으려다 말았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쓸쓸하게 웃는다. 우리 순미 씨 얼굴에 언제 저렇게 주름이 생겼을까. 다 큰 아들 놀리는 재미와 가게에 앉아 오가는 상인들을 향해 수다 떠는 재미와 자식같은 과일 팔려나가는 재미가 인생 사는 이유의 전부라고 말하던 엄마는 지금 어떤 재미로 살고 있으려나.      



 “이 대리는 잠깐 내 방으로 올래?”

 다 같이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편집장이 나를 불렀다. 편집장의 호출에 내가 긴장한 것은 물론, 김 실장과 고보영도 덩달아 얼굴이 굳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전 내내 편집장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던 터라 김 실장은 점심을 먹으러 나서는 길에 우리 둘에게 오늘은 주의하자며 당부를 두었었다. 편집장이 먼저 그의 작은 방으로 들어섰고 나는 남겨질 두 사람에게 괜찮을 거라며 안심시키는 투로 눈을 맞추었다. 고보영과 눈을 맞춘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주차장에서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진 뒤로, 우리 둘은 업무대화 이외에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었다. 잠깐의 눈맞춤이었지만 나는 세상이 갑자기 빛을 얻은 것처럼 반짝이는 기분을 느꼈고 지난 보름 간 지나온 수많은 순간들 중 좋았던 때라고는 방금 전 그녀와 눈을 마주친 바로 그 순간 뿐이었다.   

 작은 방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서류가 꽂혀있는 책장, 그의 덩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책상, 그리고 작은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1인용 소파와 작은 포장마차 의자가 놓여있었다. 그가 거대한 소파에 몸을 파묻자 나는 그 동그란 간이의자를 끌어와 그의 옆에 앉았다. 좁은 방 탓에 우리 두 사람의 거리는 부담스러우리만치 가까웠다. 그의 숨소리는 물론이고 입김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뒤로 젖혀가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편집장이 두 손을 서너 차례 마주 비비더니 입을 열었다. 

 “이 대리, 보니까 계약기간이 5개월 좀 넘게 남았더라. 다른 데 알아볼까봐 미리 이야기해 두는데 일단 계약 1년 더 연장해 보면 어떨까 싶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지만 마음에 밀려드는 헛헛함은 숨길 수가 없어 웃지 못했다. 편집장이 가끔 ‘우리 소식지 식구들’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당연히 나도 그 중 하나라는 생각을 의심없이 해 왔건만 이런 순간이면 결국 그 모든 것이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은 어떻게든 소화하기 힘들었다. 편집장도 내 표정에서 실망을 읽었는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가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상황이 좀 안정이 되면 그때 다시 정규직이든 뭐든 이야기를 하자. 이 대리, 내가 너 자른다고 한 것도 아니잖냐, 섭섭하게 왜 그래.”

 편집장이 달래는 투로 애써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그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나는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웃었다. 

 “네, 그럼요. 열심히, 잘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편집장은 만족스러운 듯 자기의 톡 튀어나온 배를 두어 번 가볍게 통통 두드렸다. 그러나 진짜 할 말은 따로 있었는지 나가보라는 말 없이 그대로 나를 옆에 앉혀두고는 작은 책상 한켠에 놓여있던 애꿎은 배달음식책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 대리, 그리고 하나만 당부를 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는 내내 나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손에 집어든 배달책 페이지를 의미없이 한 장씩 넘기며 말을 이었다. 

 “고 주임, 그러니까 보영이가 그러는데 덕구 너랑 연애할 거라고 그런 말을 하더라.”

 그 순간 나는 잠시 이런 상상에 잠겼다. 편집장이 ‘그래서 내가 아주 기뻤다’는 말을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리고 나는 찰나보다 짧은 그 순간동안 온힘을 끌어모아 우주를 향해 나의 상상이 현실이 되어주길 빌었다. 

 “너도 같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지?”

 줄곧 배달책을 들여다보던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확인하듯 묻는 그의 눈빛에서 그 역시 우주를 향해 내가 ‘네, 아닙니다’라고 말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치였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행여 나의 그 의미없는 말이 고보영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정말이지 그녀를 잃을 것만 같아 겁이 났다. 그러자 편집장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말했다. 

 “덕구야, 이게 참 상황이 그렇긴 하다만. 오해 말고 들어라. 너나 보영이나 나이가 적은 나이는 아니잖냐. 뭐, 요즘 결혼들 늦게 한다고도 하고 안한다고도 하고 그러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니까. 그래서 내가 너나 보영이나 상처받지 말라고 이야기하는거야. 이게 양가 어른들이 반대하는 결혼이든 연애든 그런 거는 안하는 게 좋아. 이게 지금 너한테는 아프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내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거든? 그런데 이게 두고 두고 상처야. 처가에 가면 그 눈칫밥에 힘들지, 그렇다고 마누라하고 사랑이라는 것은 진작에 식어버려서 관성처럼 살다보면 마누라도 이제 더 이상 내 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잘못한 사람처럼 살게 되는 그런 아주 기막힌 상황이 생긴다 이말이지. 너는 알아들을만한 녀석이니까 말해둔다. 보영이는 평소에는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걱정인데, 가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애라서 내가 좀 걱정이야. 그러니까 내가 마음 놓고 너희 두 사람 잘 데리고 일할 수 있도록 네가 좀 도와주라. 보영이야 나이만 먹었지, 애야. 내 말 알아들었지?”

 비참함이야 피할 길이 없었지만 나는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고 주임, 애 아닙니다. 제가 배우는 것도 많고 당차고 그래요. 곁에서 보면… 멋져요.”

 편집장은 나를 오래도록 말없이 응시했다. 나는 잠시 그 시선을 마주하다 고개를 떨구었다. 편집장이 손을 들어 내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고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의 방을 나왔다. 방문을 닫고 고개를 들었을 때 김 실장의 걱정어린 두 눈과 마주쳤고 그 뒤편에 서 있던 고보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평온한 얼굴과 달리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계약 1년 연장하자고 하세요. 잘됐죠.”

 김 실장은 나를 위해 웃어주었고 고보영은 우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퇴근하니?”

 김 실장이 물었다. 

 “네, 퇴근 안하세요?”

 “해야지,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갈래? 애들이 오늘 시댁에서 저녁 먹는다고 해서, 나도 오랜만에 여유가 좀 생겼는데.”

 “아뇨, 죄송해요. 오늘 시장에 가요.”

 “엄마?”

 “네, 오늘 사람들하고 회식같은 거 하는데 저도 오라고. 저도 다 아는 분들이라.”

 “그렇구나, 회식은 어디에서 해? 시장분들이 가는 곳이면 맛있는 곳 아니야? 제일 잘 아실 거 아냐.”

 “아, 그 할머니 족발집이요, 아세요?”

 “아, 알지, 우리 남편이 거기 족발 좋아해. 아쉽지만 보내줘야겠네. 엄마를 이겨볼 순 없지. 하하. 그럼 들어가 봐.”

 나는 사무실을 나서는 길에 고보영 자리를 지나쳐가며 힐끗 책상과 의자를 살폈다. 그녀의 컴퓨터는 켜져 있었고, 가방은 물론 외투까지 그대로였다. 이제 겨울 추위가 한창인데 외투도 없이 어디를 돌아다니는 것인지. 사무실을 나와 버스정류장을 향하는 길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도 나는 주변을 기웃거렸다. 혹시 고보영이 근처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은 아닐지, 만나면 무어라 해야할지 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버스가 내 앞에 멈춰섰다.  

 “안 타요?”

 버스 운전기사의 채근에 나는 주변을 다시 한번 두리번거리고는 그대로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이면 이 시간에 버스며 지하철이며 사람이 넘쳐날텐데 홍영은 아니다. 이곳에선 되려 낮에 사람이 많다. 중고등학생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리고 가끔 드물게 나같은 직장인이 버스를 탄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버스를 타고 시내 한 바퀴를 도는 시간보다 더 긴 이곳에서 어느 직장인이 버스를 타려 하겠는가. 그러고 보니 고보영도 차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에 가곤 했다. 생각에 그곳에 미치자 퇴근길을 함께 걷던 고보영의 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버스를 타는 부류가 또 하나 있었구나. 헤어지는 때가 아쉬운 연인들에겐 배차간격이 긴 버스가 오히려 낭만이었겠구나. 그걸 이제야 깨닫는 나는 그녀 말처럼 참으로 멍청하다.       


    

 족발집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모여있는 사람의 수가 적었다. 

 “아줌마, 안녕하세요. 엄마는요?”

 “어! 덕구야, 엄마 저기에 계셔, 잘 지내니?”

 “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청일수산 수영 아줌마가 가리킨 곳으로 가니 엄마까지 네 사람이 소반을 가운데 두고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퇴근하고 바로 달려온 것인데도 엄마는 이미 슬쩍 취기가 올랐고 같이 앉아있던 아저씨 두 사람은 거나하게 취했다. 나는 엄마와 주변 사람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며 엄마 뒤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권일이네 아저씨가 아는 체를 했다. 

 “어이! 자랑해 마지 않는 아드님 오셨어!”

 엄마가 등 뒤에 앉아있던 나를 돌아보았다. 

 “어! 덕구야! 일찍 왔네! 이리 와서 앉아, 너도 먹어.”

 오랜만에 엄마 목소리가 밝다. 

 “생각보다 사람이 적네. 오늘은 왜 이렇게 적어?”

 나는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말은 그랬지만 기실 박춘수를 찾고 있었다. 두리번거리기를 멈추고 소반에 둘러앉은 이들을 바라보니 자기들끼리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무슨 상황인가하여 엄마를 돌아보니 젓갈집 유미 아줌마가 나선다. 

 “아니, 무슨 덕구가 애야? 나 얘보다 어릴 때 시집왔어. 얘도 알아야지, 지 엄마 일인데, 지도 알아야 무슨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 줄 거 아냐.”

 유미 아줌마의 말에 엄마가 왼쪽 팔꿈치로 아줌마의 갈비뼈를 쿡 찔렀지만 아줌마는 몸을 털며 말을 이었다. 

 “언니, 그러는 거 아냐. 언니가 덕구 키운다고 오죽 고생했어? 얘 덕구야. 지금 시장 장난 아니야.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는 됐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시장 지켜보려는 사람들만 모인거야. 이미 하 사장한테 붙어가지고 상가 분양 한번 받아보려고 온갖 아부는 다 떨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 뺐어, 다!”

 유미 아줌마도 취기가 올랐는지 팔을 크게 내저으며 ‘다’라는 단어를 강조했고 그 바람에 소주잔 하나가 엄마 쪽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야! 야! 유미야, 곱게 취해라, 하하하하.”

 “하하, 언니, 미안. 덕구야, 여기 우리가 영웅이야, 영웅! 운곡시장 안 망한다, 우리가 다 지킬거야, 덕구야. 이게 어떤 시장이니, 하하하하”

 “유미야, 지금은 너나 지켜, 하하하”

 은희네 아저씨가 아줌마에게 퉁을 놓자, 유미 아줌마는 눈을 한번 흘기더니 다시 웃으며 잔에 술을 담았고, 은희 아줌마는 엄마에게 기대며 한 옥타브 올라간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덕구 보니까 생각난다. 내가 예전에 결혼식 하면 저기 임페리얼 웨딩홀, 거기에다가 떡 많이 팔았거든. 내가 너무 바빠서 고사리 손이라도 빌려야겠다 싶어서 유미랑 주미 어렸을 때 꿀떡 상자 하나 들려주면서 웨딩홀로 보냈었어. 방금 만든거라 상자 연 채로 가져다 드리라고 해서 들려보냈지. 그런데 한참 지나서 웨딩홀 그 식당 언니가 전화를 준거야. 떡이 안 왔다고.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서 웨딩홀 가는데, 글쎄 요것들이 덕구랑 셋이 쪼그리고 앉아서 꿀떡을 양볼에 가득 물고 먹고 있더라니까. 그때는 아주 불같이 화를 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렇게 화를 냈나 몰라, 미안하다, 덕구야. 하하하하”

 “덕구야, 용서해 주지마, 떡 몇 개 먹은 거 가지고 치사하다, 안 그러냐, 허허허”

 권일이네 아저씨가 웃으며 내게 술을 권했다. 내가 두 손을 받아 한숨에 넘기자 이번에는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누님, 덕구, 이놈 술을 아주 잘 마시네, 허허. 각이 딱 잡혀가지고, 새끼. 이놈 생각해 보니까, 너 대학 간다고 했을 때 술 가르쳐 준 사람이 나 아니냐? 맞지, 덕구야?”

 그러자 언제 자리에 왔는지 권일이네 아줌마가 아저씨 등을 한 대 치며 말했다. 

 “웃긴다, 자기가 가르쳐 준거야? 그날 덕구 핑계대고 술 마셔서 아주 누가 보면 지 아들이 대학 간 줄 알았지, 뭐. 그때 어디에서 배웠는지 골든벨이라는 말을 배워와 가지고 아주 부어라, 마셔라. 덕구야, 그 술값은 이 아줌마가 다 낸거다, 아저씨가 아니야. 하하하”

 권일이네 아줌마 말에 아저씨가 장난 섞인 투로 성을 내며 버럭했다. 

 “이 사람 봐라. 덕구야, 말은 바른 말이지, 내가 너 어릴 때부터 준 동전이 몇 개냐. 그거 이자까지 붙였으면 너 임마, 지금쯤 차를 샀어야지. 크크크. 아 맞다, 너 이 새끼, 그때 문씨 할아버지 문방구에서 쬐끈한 자동차 하나 훔쳤다가 호되게 당하는 걸 내가 그 돈 갚아줬다. 아무튼 너 나한테 빚있어. 돈 많이 벌어라. 떼돈 벌어서 니 엄마 큰 가게 하나 내 주고 내 돈도 갚아라. 알았냐?”

 엄마가 아저씨 등을 다독이자 어른들은 다시 그들의 대화로 돌아갔다. 나는 엄마 뒤편에 어정쩡하게 앉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주렁주렁 매달린 백열등이 어두운 시장을 별빛처럼 비추고 있었다. 모여앉은 사람들이 말을 할 때마다 그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만둣집 김처럼 뽀얗게 일었다. 나는 익숙한 길목과 골목을 눈으로 걸었다. 지금은 곁에 없는 그 옛날 참으로 고왔던 은옥 아줌마와 함께 놀던 어릴 적 동무들과 지금은 하얗게 늙어버린 아줌마와 아저씨의 젊은 시절과 모두가 덕구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던 수많은 순간들이 하나씩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잊고 엄마에게 상가분양을 넣어보자던 내 어리석은 말들과 나조차도 지레 포기해 버린 운곡시장을 지켜보겠다던 이방인 박춘수를 떠올렸다. 우리들 모두 나름의 이유로 운곡시장을 포기하지 못하듯 박춘수도 그러했음을 그 순간 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러자 가슴이 뻐근해져 왔고 나는 애써 웃으며, 떠드는 어른들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박춘수 씨는요?”

 내 물음에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서로에게 눈짓으로 말을 미루던 이들은 술잔만 들이켰고, 보다 못한 권일이네 아저씨가 말문을 열었다. 

 “이제 못 나온다더라. 서울로 돌아간다던데. 아는 사람이야? 가깝게 지내지마. 여기 요양하러 잠깐 온 사람이 자기가 뭐나 해 줄 것처럼 나서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어. 운곡산이나 보러 왔으면 조용히 있다가 갈 것인지 왜 끼어들어서 말이야. 너도 그 사람 다시 부르자 말자 그런 말 하지 말어, 그건 우리끼리 다 정리된거야.”

 아저씨는 떨어진 술맛을 되찾으려는 듯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 사람도 여기 홍영에 살려고 온 거예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를 짜내어 소리 내 이야기해 보았지만 보잘 것 없는 내 외침은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현 듯 머릿 속 가득 박춘수를 찾아야한다는 생각만이 차올랐다.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분명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우연이 남아있을 것이다. 

 “덕구야!”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장에서 운반배달을 해 주는 종수 아저씨였다. 나는 아저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웃으며 자신의 오른편을 가리켰다. 

 “우리 덕구, 연애하냐?”

 고보영이었다. 종수 아저씨의 말에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그녀를 향한 수많은 눈들을 향해 인사했다. 나는 엄마가 보기 전에 황급히 그녀에게로 향했고 그녀의 팔을 낚아채 듯 잡고서 빠른 걸음으로 시장 입구를 향해 갔다. 누군가의 핀잔에 사람들의 작은 소란은 다행히 잠잠해졌고 뒤를 돌아보니 어른들은 다시 그들의 대화로 돌아갔다. 


  한참을 걸어 시장 입구를 지나 한적한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고보영을 놔 주었다. 고보영은 옷매무새를 바로 잡더니 나를 바로 서서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긴 어떻게 왔어?”

 내 물음에 고보영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김 실장님한테 너 퇴근한 건지 여쭤봤는데 알려주시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늘 방에 들어가서 무슨 이야기했어?”

 “계약 연장됐다고.”

 “그 이야기 말고.”

 고보영은 차분했고 나는 흔들렸다. 나는 대답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겨울이 내려앉은 밤공기는 추웠지만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에 닿은 그녀 얼굴은 눈처럼 빛났다. 

 “너랑 연해할 거라고 그랬었어. 아빠는 상관하지 말라고. 그랬더니 덕구는 아닐 거라면서 너한테 물어본다던데. 그래서, 넌 아니라고 했어?”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해야할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비겁해졌다. 

 “덕구야, 너 무슨 꽃 좋아해?”

 생뚱맞은 질문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코끝이 추위에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사람들은 그렇잖아. 꽃이 꽃이라서 좋아하잖아. 꽃이 가진 향기나 색 그 자체만 좋아하잖아. 그 꽃이 어디에 피어있든 좋아하는 꽃을 보면 마냥 좋잖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듯 말을 멈추고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덕구야. 나, 그냥… 꽃처럼 좋아해 주면 안돼?”

 추위에 내 뺨은 얼어붙었고 입술도 얼어붙어있었지만 나는 마음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번져오는 온기를 거부할 수 없었다. 내 눈앞에 꽃송이처럼 눈송이처럼 밤처럼 빛처럼 빛나는 고운 그녀를 안아주지 못할 이유를 나는 단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므로 두 팔을 크게 벌려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 묻어있는 달큰한 꽃향기를 나는 큰 숨으로 들이켰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간다던, 홍영에 살고 싶었다던, 하얀 셔츠를 곱게 다려입고 봄처럼 웃어주던 박춘수를 떠올리며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으로 그를 잃고 말았는지 아프게 깨달아야 했다.    

  

(수요일, 3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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