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새에 계절은 겨울이 되었다. 그리고 겨울과 함께 고보영과 나의 비밀연애도 시작되었다. 홍영 시내는 너무나도 좁았던 탓에 우리는 편집장의 눈과 귀를 피해 주말이면 운곡산에서 연애를 했다. 어린시절 놀이터가 되어주고 이십 대 언저리에는 갑갑한 마음을 풀어놓을 쉼터가 되어주었던 그곳에서 나는 꼭 잡은 그녀의 손을 나의 외투 주머니에 넣고 함께 숲길을 걸었다. 내게 예뻐보이고 싶다며 구두를 신고 온 그녀에게 나는 편히 걸으라며 운동화를 첫 선물로 건넸고 연인끼리 신발을 사 주면 헤어져서 받기 싫다는 그녀에게 ‘그럼 산에 올 때만 신어, 내 신발인데 빌려주는 걸로 하자’고 했을 때 그녀는 환히 웃었다. 그리고는 운동화로 신발을 바꿔 신고 그녀는 내게 팔짱을 끼었고 나는 그 순간을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토록 사랑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시렸다.
“에이, 거 되게 찝찝하게 성가시네.”
편집장이 사무실로 들어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꾸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김 실장과 달리 나와 고보영은 눈빛을 주고 받으며 혹여 누구에게서 우리 둘의 연애를 전해들은 것은 아닐지 걱정되어 편집장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김 실장이 편집장에게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표정이 안 좋으시네. 또 하 사장이에요?”
편집장이 김 실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신경 쓰지마. 좀 잠잠해진다 싶었더만 더한 놈이 나타나서는, 에이.”
편집장은 그렇게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자신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말과 함께 남겨진 우리 세 사람은 눈만 끔뻑거리며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다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미리 약속한대로 고보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10여 분의 시간차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실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가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조심해, 너무 티 나.”
“네?”
내가 되묻자 김 실장은 편집장이 들어가 있는 그의 작은 방 쪽을 향해 한번 힐끗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 주임이랑 연애하는 거, 너무 티 난다고. 특히 점심시간에. 같이 밥 먹을 때 자꾸 눈 마주치면서 둘이 피식피식 웃지 좀 마. 그럴 때마다 내가 편집장한테 말 시키느라 아주 진땀을 뺀다고, 얼마나 조마조마한지. 조심해, 알았지? 오해는 말고. 참고로 나는 두 사람편이야.”
그녀가 내 어깨를 가볍게 한번 툭 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돌아선 그녀의 등 뒤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줄곧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가 한번은 나를 바라봐 주기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고, 아무도 곁에 없다는 듯 하루 일을 마무리하는데만 신경을 쏟았다.
사무실을 나와 다음 정거장을 향해 걷고 있을 때 골목길에 숨어있던 고보영이 내 뒤를 살피며 천천히 걸어나와, 내 곁에 서서 함께 걷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한참 기다렸잖아.”
가로등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따뜻하게 빛났다.
“미안, 추웠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멈칫하고는 다시 손을 외투로 쓸쓸하게 찔러넣었다.
“후우, 미안하다. 추웠을텐데 손도 못 잡아주네. 다음부터는 내가 나갈게.”
내 말에 그녀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뭐라는거야, 그리고 지금처럼 번갈아가면서 해. 그냥 나는 너가 1분만에 나왔다고 해도 한참이라고 생각했을거야, 크크.”
똑부러지고 당차다고만 생각했던 그녀가 아이처럼 웃는다.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한켠으로 간신히 녹아내린다. 한 정거장을 걸어 우리는 다음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정류장에 나란히 서서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는데 고보영이 내 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응?”
고개를 돌리자 그녀 특유의 장난꾸러기같은 얼굴이 되어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내일은 뽀뽀하자.”
“어? 아 진짜, 뭐라는거야. 그런 걸 왜 미리 말해.”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채 하며 말하자 그녀가 배를 잡고 허리까지 숙여 가며 깔깔 웃었다.
“하하하하하, 난 덕구 너가 그 황당하다는 표정 지을 때 너무 좋더라.”
때마침 버스가 저편에서 우리를 향해 미끄러져 들어왔고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발 앞에 멈춰선 버스를 가벼운 걸음으로 폴짝 올라탔다. 그녀를 따라 버스에 오르자 우리를 포함해 승객은 대여섯 뿐이었다. 그녀는 맨뒷자리로 가려다 그보다 한 줄 앞 두 사람이 앉는 자리로 가서 자리를 잡더니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나를 불렀다. 그녀 옆에 앉자 그녀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덕구, 이제 밤새 내일 뽀뽀 언제 하려나, 이 생각하느라 잠도 못 자겠네.”
“아우 진짜, 무슨 꽃이 이렇게 짓궂어. 그리고 김 실장님이 우리 사귀는 거 아시더라.”
그녀가 웃음을 거두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 퇴근하는데 조심하라고 그러시더라고. 우리 편이래. 점심 때 자꾸 눈 마주치면서 웃지 말라고. 내 생각엔 너야. 티 좀 내지마.”
고보영이 입을 삐죽거렸고 나는 슬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손바닥에서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류장에서 내려야하는지 우리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어떤 의미도 없었고 전혀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춘수 삼촌한테는 연락 안 해볼거야?”
출근하러 집을 나설 때마다, 퇴근길 집 현관문 앞에 설 때마다 나는 802호를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번 살폈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현관문은 영원처럼 닫혀있었고 불은 꺼져있었다. 딱 한 번, 아주 딱 한 번 퇴근길 아파트 복도를 걷는데 그의 집 불이 켜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불빛이 새어 나오는 802호 복도쪽 방 창문 아래까지 무심코 걸어갔다가 현관문에 다다르기 전 우뚝 멈춰섰었다. 그 순간 입가에 잔잔히 미소를 걸어두고 내게 들어오라며 몸을 틀어 길을 내어주던 그의 모습과 그의 현관을 코앞에 두고도 그 마지막 한 걸음을 떼지 못하는 내 모습이 서글프게 엇갈렸고 나는 주저앉아버린 마음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집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뭐하러, 그쪽도 연락 딱히 없어.”
고보영이 손에 힘을 주어 내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춘수 삼촌은 못하는 거겠지.”
그녀 말이 맞았다. 박춘수는 연락하고 싶어도 내게 못하는 것이 맞을테다. 나 또한 그에게 전화를 걸어 고보영과 비밀연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와 그것이 얼마나 내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또 박춘수가 했었다던 그 사내 비밀연애는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 셋이서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그 말을, 그리고 아무렇게나 초콜릿이 박힌 거대한 쿠키를 사갈테니 콜라만 준비해 두라는 그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에게 전화를 걸어 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엄마를 포함하여 다가오는 변화를 받아들여보려 애를 쓰는 시장 사람들이 행여 박춘수로 인해 또 다시 혼란스러워질까봐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홍영에서 살고 싶었다던 그 말에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고보영의 집이 위치한 곳에서 정류장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렸다. 한참을 또 그렇게 걷다 저 멀리 보이는 그녀의 집을 발견하고는 약속했던대로 잡았던 손을 놓았다.
“들어 가, 바래다 줘서 고마워. 내일은 내가 우리 덕구 바래다 줄게.”
그녀가 뒷짐을 지고 선 채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고운 꽃 같았다. 나는 말했다.
“라일락.”
“응?”
“좋아해. 좋아하는 꽃같은 거 따로 없었는데, 너가 라일락 닮아서 라일락 좋아하기로 했어. 좋아해. 라일락.”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나는 가만히 마음 속으로 속삭여보았다 – 보영아, 너랑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수만 있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아쉬운 비밀연애말고 영원한 것 너랑 할 수 있었으면 그 어느 것이든 좋겠다.
엘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했다.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고 나는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뒤로 박춘수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지만 문이 다 열리도록 어느 누구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천천히 복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복도 끝 언저리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내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우리집까지 거의 다다랐을 때 나는 그것이 박춘수의 집에서 나오는 불빛임을 알 수 있었다. 집안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조심스러운 움직임 뒤로 간혹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오랜만에 그의 집에서 인기척을 느낀 터라 나는 반가운 마음에 잠시 안에서 나는 소리를 엿들으려 몸을 기울였고 그 순간 박춘수의 기침소리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뭘 그렇게 급하게 들어와, 누구 있어?”
엄마가 놀랐는지 걱정 반 핀잔 반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밥 먹었어?”
“방금, 너는? 아무것도 안 먹고 이제 온 거야? 요즘 퇴근이 왜 이렇게 늦어, 일이 많아?”
엄마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을 것 같아 나는 슬며시 몸을 빼어 엄마를 피해야겠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아니, 엄마, 내가 알아서 저녁 차려먹을테니까 엄마는 방에 들어가서 쉬어.”
엄마는 먹잇감을 물었다고 생각했는지 작정한 듯 말을 이었다.
“덕구야, 너 이리 와서 좀 앉아봐. 너가 요즘에 퇴근이 늦어서 내가 이야기할 틈이 없었는데 오늘은 해야겠다.”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몸을 돌려 식탁으로 향하며 내게 말했고 나는 엄마가 식탁의자에 앉기 전 외투를 벗어 내 방으로 황급히 향하며 말했다.
“엄마, 내가 진짜 지금 너무 피곤해서, 오늘 말고 내일 해, 알았지? 내일 해. 내가 내일은 꼭 들을게.”
엄마는 나를 잡아세우려 손을 몇 번 힘없이 내저었지만 나는 낮에 했던 김 실장의 말이 생각 나, 얼른 엄마를 무지르고 재빨리 방으로 들어와버렸다. 다행히 엄마는 방까지 따라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커텐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어디에서부터인가 먼 빛이 날아들었다. 나는 방바닥에 내려앉은 그 빛의 무리 곁에 가만히 앉아 이를 바라보았다. 먼 곳에서 달리는 차가 더 먼 곳으로 떠나가는 소리, 오토바이가 으르렁대며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 엘리베이터가 닫혔다 열리는 소리, 그 뒤에 반대편 복도로 멀어지는 발소리, 가끔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창문이 덜덜거리는 소리, 그리고 박춘수의 집에서 정체를 알 수 없이 간혹 들려오는 쿵쿵 소리를 모두 들으며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몸에 한기가 들어 눈을 떠 보니 밖은 더 어두워졌고 더 조용해졌다. 엄마가 방에 들어왔다 갔는지 외출복도 벗지 않은 몸 위로 이불 하나가 덮여 있었고 창문도 닫혀있었다. 맨바닥에서 자다 일어나 그랬는지 몸을 일으키가 온몸이 쑤셨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가까이 되었다. 씻으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엄마가 물소리에 깰 것 같아 나는 옷만 얼른 갈아입었다. 이불을 펴고 잠이 달아나기 전 얼른 자리에 누웠는데 눈을 감으니 정신이 더욱 또렷해져왔다. 겨울 바람이나 잠깐 쐬다가 따뜻한 이부자리에 기어들어오면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잠옷에 외투만 대충 걸쳐입고 조심히 현관문을 열어 아파트 복도로 나왔다. 깜깜하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아파트 복도는 밝았다. 그리고 복도를 밝힌 불빛의 정체는 여전히 박춘수의 집이었다. 새벽 2시라는 시간 탓이었을까, 나는 이 깊은 밤 아파트에서 깨어있는 사람이 그와 나, 단 둘뿐이라는 생각에 새어나오는 불빛을 난로삼아 가만히 복도 난간에 기대어 외투를 목끝까지 끌어올리고는 한참동안 그 불빛 곁에 서 있었다.
“덕구야, 일어나. 너 오늘 출근 안해?”
눈을 떠 보니 8시 20분이었다. 화들짝 놀라 이부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나 부리나케 방문을 열고 화장실로 향했다. 대충 눈곱만 떼고 물로 머리를 쓸어내듯 매만진 다음 꽁무니에 불이 붙은 사람처럼 방으로 달려가 손에 집히는대로 옷을 입고 어젯밤 벗어둔 가방 그대로 등에 멨다. 현관에서 신발에 발을 구겨넣으며 엄마와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는데 어쩐 일로 박춘수의 현관문이 활짝 열러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이럴 때가 아니다 싶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택시를 부른 뒤 사무실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간신히 9시를 맞춰 날아들 듯 사무실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모습에 고보영과 김 실장이 웃었고 편집장이 회의테이블 의자에 느긋하게 기댄 채로 내게 말했다.
“아이고, 사장님 오셨습니까.”
편집장의 능청에 김 실장이 웃으며 대꾸했다.
“진짜 편집장님도, 내 기억엔 이 대리가 지각한 적도 없는데 왜 그러세요. 지금 딱 9시잖아요. 너무 그러면 젊은 애들이 꼰대라고 해요. 지각도 아니구만.”
그녀의 말에 편집장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껄껄 웃으며 김 실장의 말을 받아쳤다.
“말해놓고 보니까 나도 사장님이 있었으면 좋겠네. 이런저런 걱정 없이 일 열심히 하면 꼬박꼬박 돈 챙겨주는 사장님, 세 사람은 좋겠어.”
“그럼 저한테 넘겨주세요. 제가 월급 꼬박꼬박 드릴게, 하하하하하”
김 실장의 말에 편집장이 기분좋게 웃었고 그 틈을 타 나는 고보영과 눈을 맞추며 아침인사를 나누었다.
이른 오전부터 군청으로 바로 나섰다. 군청에서 딸기농가의 판매촉진을 돕는다며 시식행사가 있었다. 내게 취재를 나와주어 고맙다며 농부 한분이 딸기를 한 상자를 주신 덕에 나는 마음이 즐거웠다. 시식행사를 마치고 편집장이 시킨대로 군청을 돌며 몇몇 국장에게 편집장의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우연히 도시개발국 앞을 지나게 되었다. 사무실 앞 작은 게시판에는 몇 개의 포스터와 공고문이 붙어있었다. 발길을 멈추고 혹여 엄마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있을까 하여 눈으로 이것저것을 찾는데 인쇄조차 흐릿하게 된 A4용지에서 눈길이 멈췄다. 새로움터 건설사 선정 공고였는데 2회 유찰로 BH개발과 수의계약을 진행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공고문이었다. 박춘수의 말대로 BH개발이 선정된 것이다. 그러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홍영 사람들 모두가 결국은 BH개발이 수주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박춘수는 다만 남들보다 일찍 알았을 뿐이었다. 먼저 알았든 늦게 알았든 우리 삶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그녀의 말대로 오늘 퇴근길은 고보영이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들어 가.”
운곡맨션 입구에서 조금 못 미친 곳에서 그녀가 말했다. 말은 그랬지만 나도 고보영도 서로의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오늘 아주 부지런히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 바쁜 와중에도 뽀뽀라는 단어는 끈질기게 내 생각을 따라다녔고 그녀와 함께하는 오늘이 저물어 가는 그 순간 나는 너무나도 초조해졌다. 고보영이 뽀뽀하자던 내일이 바로 오늘이었고 오늘을 마무리하며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마치 그 말을 잊은 것처럼 뽀뽀 이야기는 단 한번도 하지 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슬며시 손을 빼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 내일 봐.”
그녀가 뒷걸음으로 한발자국 내딛었다. 나는 멀어지지 않으려 그만큼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그녀가 다시 뒤로 한걸음을 걸었고 나도 앞으로 한걸음을 걸었다.
“하하하 뭐야, 들어 가.”
“보영아.”
“응?”
내가 먼저 입을 맞춰야 하나. 그 순간 내 머릿 속은 ‘우리 내일은 뽀뽀하자’던 고보영의 꽃같은 얼굴만이 가득해졌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말갛게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
그때 그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외마디를 내며 나를 향해 성큼 걸어왔고 외투에 찔러두었던 내 손을 빼더니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내 주먹을 동그랗게 말며 말했다.
“오늘의 뽀뽀야.”
나는 허탈함에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고 그런 나를 그녀는 장난기 잔뜩 오른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덕구, 뭔가 개운하지 못한 것 같네. 설마 둔한데 응큼하기까지 한 건 아니겠지. 그건 정말 최악이잖아. 크크.”
나는 그녀가 내게 준 입맞춤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
“분명히 ‘우리’라고 했다. 내일은 내가 할거야.”
나의 말에 고보영이 입을 삐죽거리더니 그대로 뒤로 돌아 멀어져갔다. 나는 그녀의 등 뒤를 향해 소리쳤다.
“버스정류장까지만 데려다 줄까?”
그러자 그녀는 힘차게 두 팔을 앞뒤로 휘저으며 말했다.
“아아니이!”
멀어지는 고보영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뒤로도 얼마쯤 더 서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아파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파트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며,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아파트 복도를 걸어가기까지 나는 줄곧 입가에 흐르는 미소를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멀어져가던 고보영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걷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환화게 불을 밝힌 박춘수의 집이 보였다. 나는 손 안에 고이 담아쥔 고보영을 떠올렸고 그 덕에 가슴 속 저 어디에선가 용기가 샘처럼 솟아나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리고 나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겨 그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내 머릿 속은 온통 내가 누리는 행복을 박춘수와 나눌 생각, 그리고 그가 나만큼이나 기뻐해 주리라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활짝 열린 802호 앞으로 섰다. 그리고 집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주광색 조명 아래로 텅빈 거실이 보였고 그 한가운데 엄마 또래의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나는 멈칫하고 다시 한번 호실을 확인했다. 802호가 맞았다. 틀릴 리 없었다. 분명 박춘수의 집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 낯선 여자 역시 내 출현을 예상치 못했다는 듯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머지 않아 반갑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머, 덕구야.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아, 네. 그런데…”
“나, 어머, 얘가 날 모르네. 서운하다, 여기 한마음부동산 아줌마야. 기억 안 나?”
그렇다. 엄마의 동네동무 중 한 사람이었다. 엄마와는 간혹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나는 아줌마를 본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집에 엄마 계시니? 안 그래도 온 김에 보고 가려고 했는데 잘됐다.”
아줌마는 서둘러 집안의 온 불을 끄고는 박춘수의 집에서 나왔고 나를 앞세워 우리집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언니, 나야, 한마음.”
“응?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문이 열렸고 나와 아줌마를 나란히 발견한 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다.
“뭐야, 왜 덕구랑 같이 와.”
“같이 온 게 아니라 이 앞에서 만났어. 오랜만이다, 언니.”
아줌마는 익숙하게 식탁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엄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아줌마를 보며 나는 박춘수의 휑한 거실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아줌마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목에 걸린 그 질문을 뱉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엄마가 나를 불렀다.
“맞다, 덕구야. 이거 주라던데.”
엄마는 식탁 위에 놓여있던 신발상자보다 조금 큰 상자를 내게 건넸다.
“이게 뭔데…”
“옆집 박춘수 씨가 너 주라고 그러더라. 오늘 나가면서.”
“어딜 나가?”
나의 물음에 엄마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 사람들이 그러는데 둘이 자주 붙어다녔다던데. 오늘 이사 나갔잖아. 어머, 진짜 몰랐던 표정이네. 어제도 내가 너한테 이야기해 주려고 했는데 너가 잠들어 버렸더만. 이거 너 주래. 인사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고 그러더라.”
나는 상자를 받아들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엄마는 내게서 몸을 돌려 식탁에 앉은 아줌마에게로 향하며 물었다.
“그래서, 집은 나간거야? 계약기간 한참 남은 거 아니었어?”
아줌마는 엄마가 내어준 귤을 한 개 까며 대답했다.
“그게 그 사람 입장에서는 일이 좀 잘 풀렸어. 아, 언니는 모르나? 여기 802호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진짜 사람 일은 모른다더니. 할아버지가 아프다고 올라갔는데 간병한다고 같이 따라간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실 줄 누가 알았겠어. 할아버지도 어차피 혼자서 못 지내니까 아들집에서 그냥 지낸다더라고. 그래서 집 내놨지, 뭐. 보증금도 뭐 얼마 안하니까 바로 내주고 해서. 802호 살던 그 젊은 사람한텐 잘된거지.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 갈 줄 몰랐네. 좋은 사람 같았는데, 젠틀하고.”
나는 상자를 안아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불을 켰다. 외투까지 벗어놓고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 너머로 두런두런 들려오는 아줌마와 엄마의 이야기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상자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고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내가 그리도 갖고 싶어했던 카메라 라이카 Q-P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빛나는 콜라 한 캔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고이 접은 쪽지가 놓여있었다. 나는 쪽지를 집어 천천히 펼쳐들었다. 그 안에는 정성스레 꾹꾹 눌러쓴 박춘수의 말이 놓여있었다.
‘이 정도면 과외비 치고 괜찮지 않냐. 나보다는 네게 맞다. 잘 지내라. 고마웠다.’
참고 참으며 눌러두었던 울음이, 억울러왔던 후회가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이를 악물고 버텨보려 했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새어나오는 울음을 주어담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무너져내렸다.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들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나는 할 수 없었다. 그 상자 가득 담긴 박춘수의 인사는 완전한, 아주 완전한 작별이었기 때문이다.
(금요일, 3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