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일기
나의 첫 일기 제목은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나답게 만들어주는 어떤 면이 있다면 그건 언제, 어디서 만들어진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쓰게 된 일기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산동네에 살았다. 집에서 나와 학교에 가려면 긴 언덕을 내려와서도 한참을 더 가야 했다. 가방은 왜 그렇게 무거웠는지 그런데도 그 무거운 가방을 메고 잘도 뛰어서 학교에 가곤 했다. 그 아침들에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없다. 학교 가기 바빴지. 내가 오래오래 기억하는 건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길이다.
교문을 나와 문방구가 잔뜩 늘어선 골목을 지나 4차선 도로의 지하차도를 건너 쭉 가다 보면 주택가로 접어들게 되는데, 갈수록 골목은 점점 좁아졌다. 좁아지고 또 좁아진 길을, 행여나 고양이나 쥐가 튀어나올까 싶어서 몸을 움츠리고 서둘러 걸었다. 걷고 또 걷고 어두운 굴다리 밑도 지나 구불구불한 마지막 골목을 겨우 벗어나면 탁 트인 긴 언덕이 나왔다.
와, 이제 됐다. 그 길에 서면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언덕의 끝에는 산이 있었고 그 꼭대기의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그림같이 서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내내 꽃이 피고 지고, 잎이 무성히 자라다 물들어 떨어지던 그 언덕길 위에서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졌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봄에는 개나리가 먼저 싹을 틔우고 분홍 진달래가 피었다. 여름엔 키가 큰 해바라기들이 얼굴을 활짝 내밀었는데 목이 너무 길어서 이리 저리로 구부러지던 그 모습이 왠지 보기 좋았다. 해바라기는 질 때가 되면 얼굴이 까맣게, 못생겨지는구나 알게 된 것도 그때다. 코스모스는 가을인 줄은 어떻게 알고 나타나는 것인지, 고운 빛깔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흔들흔들 춤을 췄다. 겨울에 가장 좋았던 건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나무들이었다. 그 풍경은 정말, 정말로 꿈 같았다.
그 길 위에서 어린 마음이 아름다움으로 물들었다. 지금도 내게 아름다움은 식물의 모습으로 온다. 오래된 나무가 우거진 그늘 밑을 걸을 때면 행복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것 같다. 뺨을 스치는 바람으로도 온다. 추억을 깨우는 공기의 냄새로도 온다. 지금도 나를 가장 들뜨게 하는 건 그 언덕 위에서 누렸던 아름다움과 모조리 상관있다.
첫 일기를 위해 처음으로 6시에 일어난 그 아침에 나는 그때가 나의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썼다. 어쩌면 그건 사실이라기보다 바람에 더 가까울지 모르지만 나는 운 좋게 그 순간을 나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떠올렸다. 그렇게 의미를 얹어서 나는 그 길 위에서 태어난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들의 결정적인 순간이 궁금해졌다. 되짚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누구나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시간이 떠오를지 모른다. 그래, 이때가 나의 결정적인 순간이었구나 하는 때가. 백 명이 있다면 백 명의 결정적인 순간이 모두 다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백 명, 천 명, 수백만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 귀하다. 모두가 다른 시간과 역사 속에서 탄생한 유일한 존재들이니까.
그러나 누군가의 결정적인 순간은 떠올리기 싫을 만큼 괴롭거나 비참할지 모른다. 분노나 두려움, 외로움이 어쩌면 당신의 결정적인 순간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묻기가 주저된다. 그렇지만 문제없어. 아무 문제 없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괜찮아.’가 아니라 ‘문제없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얼마든 새로운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두 번, 세 번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나는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일기를 쓰며 다시 태어났다. 그건 나의 두 번째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나의 세 번째 결정적인 순간은 남편의 죽음이라는 나에게 찾아온 불행을,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불행’이라는 말을 받아들였던 어느 날이다. 나에게 닥친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나는 다음 걸음으로 갈 수 있었다. 불행할 리 없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인정하지 않을 때는 인정하지 않는 일에 나의 모든 힘을 쏟았다. 다른 생각을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게 불행이 아니면 뭘까, 순순히 인정하게 되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그것은 불행이었다. 인정하고 나니 그다음 내가 어떤 걸음을 내딛어야 할지 비로소 보였다. 길은 하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별 수 없이 잘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의 결정적인 순간은 이렇게 셋, 아직은 셋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몇 번이고 더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다리지 않고 내가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믿어,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 태어날 수 있고 변할 수 있어.
어쩌면 시간이 흐른 후에 지금 이 순간을 나의 네 번째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이 빛날 수 있도록, 나의 결정적인 순간이 후회나 번민이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빛날 수 있도록 나는 앞으로도 열심일 작정이다.
그래서
당신의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