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각오
마흔을 앞두고 나는 어떤 각오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마치 한 챕터를 끝내고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달까. 새로운 챕터의 인삿말 같은 마흔 직전에 쓴 일기다.
*나는 내년에 마흔 살이 된다. 중학교 때 나는 사람이 마흔 넘어서까지 살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늙는다는 건 너무 먼 이야기였고 나와는 더더욱 상관없는 것이었어서 그 역시도 진지한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호기롭게 몇 번씩이나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은 있다. 마흔은 너무 아득한 일이었으므로 이후에 나의 관심에서 당연히 멀어졌다. 그런데 이제 나는 마흔을 앞두고 있고 별 감흥 없이 맞이했던 서른과는 마음의 무게가 다르다. 이 역시도 지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차곡차곡 쌓이는 나이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되겠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는 최초의 마흔이니 다소 유난스런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은 이 기분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데 십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면 그 싱그러움이 너무 아름다워서 질투가 날 때가 있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나 처한 상황이 행복이나 슬픔, 기쁨이나 분노 어떤 것과 연결되어 있든 상관없이 눈부시다.
한편 나보다 스무 살 이상 나이가 많은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를 봐도 또 그대로 아름다운 이들이 있으니, 아름다운 그들의 공통점은 여유가 있고 느긋하게 바라볼 줄 알며, 멈추지 않고 성장한다는 점이다. 성장을 멈춘 인간만큼 시시한 것이 없다. 마음도 뇌도 굳어버린 꼰대는 질색이다. 깨지면서 깰 줄 알고, 벗겨지며 벗을 줄 아는 상처의 흔적이 가득해도 굳을 줄 모르는 심장을 가진 인간이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인간이다.
그러니 조금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나이 든 그들의 아름다움에는 연마가 필요하다. 젊은 그들은 자체로 눈부신데 말이다. 나의 질투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 눈부신 시기를 우리 모두 한 번씩 겪어왔으니 너무 억울해하거나 부러워하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다.
밀란 쿤데라는 ‘생은 다른 곳에’라는 책에서 ‘백발의 시인이 보기에 젊음이란 인생에서 어느 특정한 기간의 명칭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나이도 능가하는 하나의 가치이다.’라는 말을 했다. 읽기 좋은 말이었다.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말이기도 해서 얼른 메모해 두었다.
그리하여 나는 ‘마흔 넘어서까지 사람이 살 이유가 있나’,라고 생각했던 그 마흔을 앞에 두고 있고, 사람이 사는데 별 이유가 필요없다는 것 정도는 아는 서른아홉이 되었다. 하나의 깨달음이 하나의 수정 구슬이고 열다섯이나 열여섯의 내가 다섯 개 정도의 수정 구슬을 갖고 있었다면 지금은 열 개 쯤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때의 수정 구슬은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물론 몇 개의 수정 구슬은 깨져버렸지만 깨진 구슬 속에서 또 다른 수정 구슬이 굴러 나와 그 수가 줄지는 않았다. 어쩌면 수정 구슬의 숙명은 깨지고 새로운 구슬을 만들어내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몇 개의 구슬은 깨질 테고 거기서 또 다른 구슬이 나오겠지. 나는 몇 개의 새로운 구슬을 품게 될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흥분이 된다. 산다는 것은 재밌는 일이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재밌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마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게 신기하다. 그때가 바로 성장하는 순간일 테니까 혹시 상처를 받는데도 너무 주눅들 필요는 없다. 빛나는 눈, 무거운 혀, 열린 귀, 굳지 않는 심장, 마흔을 앞두고 나는 이 넷에 대해 생각한다. 자꾸 웃음이 난다. 젊음이란 어떤 구체적인 나이도 능가하는 하나의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