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은 일찍 출근을 해서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고 회사 건물 밖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앉아서 바람이 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나무들의 윗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나뭇잎들이 바람을 타고 햇빛에 반짝였다. 멀리서 작게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보는 게 좋다. 나무의 꼭대기를 볼 때는 고개를 젖혔고 키 낮은 풀들을 볼 때는 다시 숙였다. 그렇게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고개만 들었다 내렸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자동차 정비소가 있었다. 가끔 눈을 감고 바람이 나를 통과하는 기분을 만끽했다. 만약 이 장면이 어느 영화의 한 씬이었다면 나는 분명 이 장면을 사랑했을 것이다. 일찍 출근한 누군가가 벤치에 앉아 고개만 들었다 내렸다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이 장면을, 가끔 눈을 감고 바람이 어디까지 닿았다 사라지나 가늠하는 그 장면을 사랑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장면 속에 앉아 있다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장면들을 꼽자면.
아침에 일어나 라디오를 켤 때, 빛이 마루 끝까지 들어오는 날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빛 속에 잠시 앉아 있을 때, 창문을 열어두고 잠들 때, 그때 바깥에서 앞동 아이 웃는 소리 우는 소리 자전거 바퀴 소리 들려올 때, 가끔 그네 타는 소리, 배달 오토바이 멈추었다 떠나는 소리, 달빛이 깊어가는 소리가 들려올 때, 잠결에 추운데도 창문 닫기 싫어서 이불을 폭 뒤집어쓸 때, 아스팔트 틈으로 올라온 풀들을 발견했을 때, 생각 없이 걷는데 아카시아 향이 불쑥 찾아올 때, 친구들과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들을 때, 같이 웃을 때, 그리고 지금, 오후 네 시에도 잠옷 바람으로 키린지의 음악을 들으며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
그리고
아직 한참 더 말할 수 있어,라고 되내는 지금.
연재 마지막 글이 늦었다. 그럴듯하게 멋진 글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이 정도로 좋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있는 곳을 내가 사랑하는 장면으로 만들면서 살고 싶다. 그러고 싶다. 누군가 내 글을 읽으며 마음이 조금 움직인 장면을 상상하는 지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