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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컵

by 박선희

남편이 제일 좋아했던 컵이 깨졌다. 남편은 그 컵에 술을 따라 마시는 걸 좋아했다. 이 컵 정말 마음에 들어, 라고 말하며 몇 번이나 컵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평소 물건에 특별히 애착을 가지는 사람이 아니었어서 그 모습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남편을 보내고 남편의 물건들을 정리했지만 모두 버릴 수는 없었다. 너무 입어서 해지고 바랜 체크 반바지가 아직 내 서랍 안에 있다. 결혼식 날 맸던 빨간 넥타이, 첫 출근에 샀던 폭 좁은 넥타이, 남편이 오래 입은 셔츠가 지금도 내 옷장 속에 있다. 남겨 놓은 남편의 물건 중에 나는 컵이 제일 좋았다. 들면 묵직하고 색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컵을 만질 때마다 남편 생각이 났다. 이 컵 정말 예쁘지, 라고 묻던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8년간 한 번도 빠짐없이 그랬다.

그랬던 컵이 깨졌다. 엄마가 ‘그 컵 깨졌더라. 왜 네가 매일 커피 마시는 컵.’이라고 말하는데 가슴이 철렁했다. 깨진 컵이 쓰레기 모아 두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물끄러미 보다가 만지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섰다.

다음날 퇴근하는데 엄마가 그 컵을 버렸을까 봐 조바심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서 찾아보니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버려야 할까, 남겨 둘까, 어떻게 할까 그러다가 또 하루가 지났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는데 머릿속에 컵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깨진 컵 갖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엄마 그 컵 그냥 둬, 버리지 말고.

왜?

그냥.

남편 컵이었다고 말하기가 뭣해서 그냥이라고 말했다.

소중한 거야?

엄마가 소중한 거냐고 물었다. 그 말이 마음을 푹 찔렀다.

응, 소중한 거야.

대답하고 나니 목이 메었다.

어째서 깨지게 두었을까. 후회가 되었는데 너무 후회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저녁에 와서 잘 싸둘게.

출근 준비하며 그렇게 말했는데 엄마는 내가 출근도 하기 전에 하얀 종이에 곱게 싸서 종이봉투에 넣어두었다. 봉투를 보는데 난감했다. 엄마는 컵을 싸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냥 컵 하나 깨진 것뿐인데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남편은 그 컵을 몇 번이나 집어 들었을까, 그 컵에 몇 번이나 술을 따랐을까, 어떤 손가락으로 잡았을까, 깨지고 나서야 컵을, 컵과 남편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나는 아마 남편의 컵과 오래오래, 어쩌면 계속 함께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바람이 컵과 함께 깨져버렸다. 오랜만에 읽은 김연수의 소설에 “삶은 인간의 바람보다 더 긴 것이에요.”라는 문장이 있었다.

나는 딸 둘, 아들 둘 아이를 넷은 낳고 싶었다. 지호에게 편하고 든든한 엄마 아빠가 되어 주고 싶었다. 나이 든 남편과 나란히 동네를 산책하고 싶었다. 산책하고 돌아와 마주 보고 맥주를 마시는 평범한 삶을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었다.

내 바람들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후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내가 품은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고 흘러가 버린대도 나는 내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 멈출 수는 없다. 컵은 가장 가까이에서 남편을 떠올리게 해주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오래오래 쓰고 싶었는데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너무 속상해서 나는 이 일기를 쓰는 동안 몇 번이나 울었다. 또 하나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흘러간다.

그래도 이렇게 이별의 문장들을 모아 두고 보니 아침보다 마음이 좀 낫다. 그냥 또 한 발 내딛는 것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혼자 있는 시간, 남편의 컵이 있어서 덜 외로웠다. 분명히 그랬는데 당분간은 커피를 마실 때마다 외로울 것 같다.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은 바람을 애틋해하며, 천천히 잊으며 살아갈 것 같다.


* 지난 연재가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결국 남편의 이야기로 연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안에 남는다.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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