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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면역력이 떨어질 때

누구나 언제든 약해질 수 있다

꽤 오랜 시간 우울 속에서 보 나에게 친구가 드라마 한 편을 추천해 줬다.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이 많이 났다고. 평소 드라마를 잘 챙겨보지 않지만 궁금증에 TV를 켰다. 드라마는 '이곳은 마음의 면역력이 떨어지면 오는 곳, 누구나 언제든 약해질 수 있다'는 대사 시작되었다.


오래전 병원 실습 때 본 적 있는 익숙한 병원의 모습이 나왔다. 이어 정신과 보호병동에 입원한 다양한 환자들과 그들에게 진심인 간호사 한 명이 등장했다. 친구는 극의 내용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드라마가 시작된 지 얼마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친구가 주인공인 정다은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진심을 다해 환자들을 대하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그녀는 상담자인 나의 모습과 퍽 닮아있었다. 련하리만큼 온 마음을 쓰는 그녀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오랜 시간 돌보던 환자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쏟아내는 통곡을 보며 그동안 내담자들을 만나며 느껴왔던 죄책감과 절망감, 무력감과 슬픔들이 마치 나의 것인 듯 떠올랐다.


초췌한 몰골에 파리한 혈색, 건조한 표정에 맥없이 풀린 눈빛. 우울증에 걸린 그녀의 모습에서 어느 날 들여다본 거울 속 내 모습이 보였다. 모든 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어떤 것도 재미없고 계속해서 자고만 싶은, 모두가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걸 알고 있지만 도무지 힘을 낼 수가 없는 그 마음이 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정신과 보호병동에 입원하기 전, 그녀는 찻길로 뛰어들며 생각했다. 달려오는 차가 나를 쳐도 상관없다고, 아니 제발 나를 좀 쳐줬으면 좋겠다고.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가기 전  머릿속을 스쳤던 생각들이 떠올랐다. 신호등을 기다리며 길가에 서있던 그때도,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한참 넋을 놓고 바닥을 바라보았을 때도. 나는 분명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다.



극 중에서 의사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난하지 않고 희망을 어넣어 주는 주변 사람들의 지지가 가장 중요하다' 했다. 그말에 난 시간 내가 받아온 지지들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몇 번씩 집으로 찾아왔던 들, 자신의 집에 데려가 먹이고 재우며 돌보아 준 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만 자던 내게 음식을 싸와서 먹는 것을 지켜던 이들나쁜 생각을 할바엔 자는 것이 낫다며 마음껏 자라고 다독여주던 이들 모두, 벼랑 끝에 선 나를 께 견뎌 지지자들이었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의 짐 속에서 공책 한 권을 발견했다. 우연히 펼쳐본 공책 안에는 나에 관한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내가 잠들고 일어난 시간, 종일 먹었던 음식들, 유지 혹은 변화된 행동들까지. 아내 관찰 일지매번 남편 내린 자가처방들-칭찬해 줌, 격려해 줌, 과일을 주문함, 꽃을 보내줌 등-으로 끝이 났다.  


한 자 한 자 쓰여있는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나는 공책을 품에 끌어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아무 생각 없이 주고받아온 연락들이 나를 돌보기 위한 그의 노력인 줄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는데... 철저히 혼자라고 생각했던 때조차 남편 그 먼 곳에서 돌보고 있었다.


렇게 혼자서 모든 시간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던 그때의 나는 사실 무수한 이들의 돌봄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었다.




우울증은 나를 돌보지 않은 자가 겪게 되는 아픔이다. 사랑받기 위해 혹은 남을 챙기기 위해 뒷전으로 내쳐진 자신의 반란과도 같. 그래서 이 우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라도 나를 우선에 두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극 중 주인공은 자신의 사소한 점들을 칭찬하고, 눌러왔던 욕구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 또한 그녀처럼 다시 우울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고 있다. 조금씩 마음의 근력을 키우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다.


 끝에서 '누구나 언제든 약해질 수 있다' 사가 떠오다. 것은 부단 마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장애는 이든 마음이 누구에게나 예상치 못하게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 말은 역으로 '누구나 언제든 다시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것은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삶의 파고 속에서 여러 번  가라앉았다 다시 올라오경험며 깨달은 사실이다.


언제 다시 휘청일지 모르는 나의 마음에게 려주고싶다. 깊은 바닥을 쳤으니 이제 올라갈 때, 약해만큼 다시 강해질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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