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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백수가 된 이유

전직 심리상담자의 백수일기 1

미루고 미루던 임용고시공부를 시작했다.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겠다고 떠난 지 2년 만이다. '학교가 싫어서, 상담이 싫어서, 이 일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지쳐서, 버거워서, 힘들어서...' 그만두고 떠날 때 끝도 없이 쏟아냈던 수많은 이유들을 뒤로하고 다시 상담 공부를 시작하기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년 동안 자살예방센터와 교육청, 중고등학교와 대학의 학생상담센터까지 여러 곳에서 '일하러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상담이 싫어 뛰쳐나왔건만.. 할 줄 아는 게 상담뿐인 나에게 들어오는 일이라곤 죄다 상담일 뿐이었다. 공사판에서 벽돌을 져 나를 지언정 곧 죽어도 상담이 하기 싫었던 나는 갖은 핑계를 대며 모든 자리를 고사했다. 그렇게 아주 필사적으로 상담을 피해 도망 다니며 백수의 자리를 지켰다.


그 덕에 '급여'라는 명목으로 돈이 입금된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났다. 통장에는 수백 개의 '출금'이 쉴 새 없이 찍혔지만 '입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상담과 아무 관련 없는 일만 찾아내어 이리저리 벌리고 돌아다니는 내게 신랑은 '돈 안 되는 쓸데없는 짓 전문가'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런 내가 다시 '돈이 될 만한 쓸데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떠오른 것은 애석하게도 상담이었다.



출금만 자유로운 백수의 통장


상담자로 사는 삶

상담자로 보낸 시간은 보람찼지만 한편으론 고통스러웠다. 매일 아침 출근해서부터 집에 돌아올 때까지 각종 문제들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나의 내담자들은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화가 나 있었고 간혹 가다가는 상담자-내담자의 타이틀을 떼고 한판 붙고 싶을 만큼 내 속을 긁어놓기도 했다. 그런 그들을 상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참는 것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는 것뿐이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안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과 자기 자신으로 인해 지금의 삶을 살아내기 버거워했다. 나는 무너져 내린 이들의 곁에 함께 주저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그들이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 다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곤 했다. 내가 가진 인내와 에너지를 그들에게 쏟아붓는 동안 나는 서서히 상담자로 다듬어져 갔다.  


교정이 참 아름다웠던 학교


기나긴 수련 생활을 마치고 정식 상담자로서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나의 모교인 한 고등학교였다. 첫 직장생활에 대한 긴장감에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더해지면서 잔뜩 힘이 들어갔다. 후배이자 제자인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쏟아부으면서 꿀 같은 4시 퇴근을 자진 반납하고 늦은 시간까지 야근을 불사했다. 모든 것은 과유불급 이건만 나는 과욕이 불러올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불태우며 살았다.


처음 얼마 동안 아이들은 나를 잔뜩 경계했다. 나는 조심스레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나의 존재를 알리고 말을 걸면서 은밀하게 영업했다. '비밀은 100% 보장할 테니 힘든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라고'. 며칠 뒤 아무도 모르게 살금살금 나를 찾아온 아이들은 나에 대한 신뢰도를 시험해보았다. 그리고 치열한 검증 끝에 아이들 사이에서 믿을만한 선생(?)으로 소문이 난 이후에야 비로소 상담실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속으로 풋 하고 웃음이 나는 사소한 문제부터 '이 작은 가슴에 이 무거운 것을 어떻게 담고 살았나' 싶을 만큼 큰 어려움까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나를 찾아오는 이들 모두를 소중히 받았다. 매 시간을 온전히 한 아이에게 쏟아부어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상담을 마치고 상담실을 나서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꼬옥 끌어안아주고 보냈다.

 

매일 출근하던 학교 WEE CLASS 상담실


사연 없는 삶이 없듯 상담실을 찾는 아이들은 저마다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도 해맑고 멀쩡해 보였건만.. 아이들은 전혀 멀쩡하지 않았다. 자퇴, 자해, 자살, 학교폭력, 아동학대.. 성인상담을 할 때 마주하지 못했던 낯설은 단어들은 나의 일상을 가득 채웠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아이를 붙들고 상담실에서 몇 달을 지내 보기도 하고, 결국 그들 중 몇 명을 떠나보낸 뒤 상담실로 돌아와 혼자 울기도 했다. 놀랄만치 많은 아이들이 학교폭력과 아동학대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살아가기를 두려워했고, 몇몇은 팔목에 검붉은 피딱지가 빼곡히 내려앉을 만큼 자해를 해오기도 했다.


생의 의욕이 가신 건조한 표정으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말하는 아이의 눈망울이 가슴에 박혀, 혹여나 그 친구를 잃게 될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저는 괜찮습니다.

초기 몇 달 간은 집에 오자마자 씻지도 못한 채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소스라치게 일어나 허겁지겁 학교로 달려가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은 뒤로는 잠들지 않고 버틸 정도가 되었지만, 몸만 겨우 깨어 있을 뿐 의식은 머나먼 어딘가를 떠돌았다. 그 상태로 할 수 있는 거라곤 멍하게 불 꺼진 방에 앉아 티비를 들여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버거운 케이스의 상담을 하고 온 날이면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뒤숭숭한 마음에 늦은 새벽까지 깨어 잠을 설쳤다. 잠을 못자 일상 유지가 힘들어진 이후로는 마시지 못하는 술기운을 빌려 억지로 잠을 청했다. 맛있다고 신나게 먹어대던 급식도, 퇴근 뒤 유일한 즐거움이던 저녁도 언제부터인가 입에 대지 않게 됐다. 늘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 소화가 안 되었고 쉽게 체하거나 배탈이 나서 몇달간 갖은 종류의 약을 달고 살았다. 


오가는 길에 마주친 동료 선생님들은 눈에 띄게 수척해진 나를 보며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늘 씩씩하게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답했다. 내가 괜찮아지기 위해서는 여느 선생님들의 말씀처럼 상담을 '적당히' 해야 했는데, 초심 상담자인 나에게 상담을 '적당히' 하는 노련함이나 스킬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 애초에 '적당한 상담'이라는 게 가능한 거였다면 내가 무식하리만큼 이렇게 온 에너지를 쏟아붓지는 않았을 터였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목이 빠져라 상담날 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과 '나 자신에게 좋은 내가 되는 것'. 결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내 마음을 모른 척하고 아이들을 위해 나 자신을 잠시 내려놓로 했다.

 

나의 영원한 첫 제자들 Copyright © 노콩 All Rights Reserved


사실 괜찮지 않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퇴근 후 씻고 나와 머리를 빗는데 머리카락 한 뭉텅이가 손끝에 딸려 나왔다. 거울 속에는 허연 속 알 머리를 가진 여자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하다 하다 머리까지 빠지는구나.' 자신을 돌보라는 몸의 아우성을 무시한 나에게 몸이 최후의 경고를 날리는 것 같았다. 몸이 본격적인 항의를 시작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은 괜찮다고 부정하던 내가 스스로 괜찮지 않음을 인정하게 된 것은 피가 비쳐 산부인과를 찾은 날이었다. 모든 검사를 마친 뒤 의사는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하혈을 하는 것은 몹시 좋지 않은 징후라며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몸이 극도로 예민해진 것 같다고 했다. 몸이 회복될 때까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하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야 비로소 내 상태를 진지하게 받아들기 시작했다.


지금껏 크고 작은 증상들을 마주할 때마다 '아니다, 괜찮다' 나를 달래며 애써 외면해 왔지만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나의 몸과 마음이 닳아가고 있다는 것을. 정말 아이들을 위한다면 그들을 돌보기 전에 나를 먼저 돌보았어야 했는데, 초짜배기 상담교사였던 나는 내가 바스러지는 걸 모른 척하면서 열심히 잘하고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속여왔다.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아이들과 억지 상담을 하느라 내 마음속에 아이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피어나는 걸 느꼈던 날, 나는 더 이상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조차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에게 좋은 나'가 되어줘야 한다는 걸 미처 몰랐던 나는, 결국 나 자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만 하겠습니다.

몇 날 며칠 밤낮으로 고민하던 나는 '우선 나를 살려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퇴사 의사를 밝혔다. 많은 선생님들이 다시 생각해보라며 나를 설득했고, 자기들을 두고 가지 말라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적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어줍잖게 상담교사 흉내를 낼 바에는 차라리 상담을 하지 않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2년 간 근무하던 학교를 나오면서 내게 남은 것은 새하얗게 태워 재가 되어버린 몸뚱아리와 무거운 마음뿐이었다. 10여 년 가까이 상담자가 되기 위해 걸어왔는데 그 길의 끝에 얻은 것이 '나는 상담자로 자질이 부족하다'는 결론이라니. 그 간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듯 허무했고, 갑자기 걸어가던 길이 사라져 버린 듯 막막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면 내게 맞는 다른 길을 찾아보자. 그리고.. 다시는 상담을 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이며 학교를 나서던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다시 상담을 하게 될 줄은, 그것도 학교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생각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본 이야기는 다음 글인 '전직 심리상담자의 백수일기 2'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duckyou-story/45

일러스트레이터 노콩 Instargram @rohkong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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