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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꿈은 더이상 돈 많은 백수가 아닙니다.

전직 심리상담자의 백수일기 4


여행과 상담의 관계

지난 여행들을 돌아보면서 여행과 상담이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부정적인 것을 비워내고 긍정적인 것을 채워가는 과정이라는 점,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에 대해 통찰해가는 과정이라는 점,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한 개인이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점이 많다.

 


정녕 이런 진부한 상담 사진밖에 없는 것인가... 싶다


비움 & 채움

내담자가 상담을 통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과 상처를 덜어내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가듯, 일상에 치이고 지친 이들은 여행을 통해 스트레스와 고민을 털어내고 회복되어 돌아간다.


백수 1년 차에 도망치다시피 떠났던 여행은 현실도피용이었지만 그 여행은 지치고 소진된 나에게 휴식과 충전을 위한 시간을 허락해주었다. 그 덕에 에너지를 충전한 내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처럼 여행은 부정을 비우고 긍정을 채워준다.  


자기 탐색 & 통찰

상담을 받다 보면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모습부터,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해왔던 모습들까지 모두 게 된다. 내담자는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모습들을 섬세하게 분석하면서 내면에 존재하는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여행을 통해서도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을 통해, 혹은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에 대해 탐색하고 깨달아가는 과정 또한 상담과 닮아있다. 스스로에게서 거리를 두고 자신의 모습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은 상담뿐 아니라 여행을 통해서도 이뤄진다.


실제로 여행은 내가 오랜 시간 받아온 상담을 통해 알게 된 것만큼이나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가끔 대책 없이 무모한 사람이라는 것도, 미련하리 만큼 고집이 세다는 것도, 생각보다 공격적이고 화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도 여행을 통해 알게 된 나의 새로운 모습이다.



알아차림

혼자 여행을 떠나본 이라면 낯설은 시공간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과 감정 하나하나가 날 것처럼 깨어서 생생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 살아있는 기분. 여행 중에 경험하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각'은 익숙한 일상에서 흔히 겪어보지 못할 신선한 경험이다.


그것은 상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알아차림과 비슷하다. 내담자는 상담자와의 대화를 통해 Here & Now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섬세하게 자각할 수 있다. 평소에 쉽게 지나치던 수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느끼는 경험은 세상 밖으로의 여행에서 뿐만 아니라 상담실 안에서도 이뤄진다.


상담실에서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강렬하다. 그 공간에서 내담자는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선명하게 무언가를 떠올리고, 느끼고, 경험하게 된다. 나 또한 여행을 통해 또 상담을 통해, 살아오면서 느껴본 그 어떤 것들보다 훨씬 폭넓고 깊은 것들을 경험했다.


그 모든 순간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내 마음속에 남아 여전히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변화 & 성장

상담의 궁극적인 목적이 내담자가 상담실 밖을 나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듯, 여행의 목적도 삶에 지친 누군가가 여행 이후에 다시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상담을 통해 나의 삶을 버텨낸 것처럼, 여행이 내게 믿음을 불어넣어준 덕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백수 1년 차에 떠났던 여행을 통해 나는 현실에 맞설 용기를 얻었다. 그 덕에 나는 무시무시한(?) 결혼을 했고, 새로운 삶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을 해 볼 수 있었다. 백수 2년 차에 떠났던 신혼여행은 내게 작은 인생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인생의 반려자와 함께 나눈 시간을 통해, 생과 사를 오가는 사고를 통해,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들의 사랑과 만리타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나를 아주 풍성하고 견고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여러 번의 여행과 여행 이후의 모든 과정들은 나를 변화시켰고, 나아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길 위에서 나 자신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기에 나는 '여행을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자기 자신과 하는 셀프 상담'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나를 살린 여행, 너를 살릴 여행

길고 지난했던 한 해가 끝날 무렵에서야 조금 환자 티를 벗을 수 있었다. 미뤄왔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지만 언제까지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백수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돈이 될 수 있는 쓸모 있는 일이 뭐지?' 질문 끝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상담'이었다.


2년 전 도망쳐 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건지, 과연 내가 다시 상담을 할 수 있을지, 다시 한다면 이제는 잘할 수 있을지... 여러 가지 상황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문득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상담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내 눈에서 빛이 난다고 했던 콩이의 말이 생각났다. 또 내가 있어 힘든 시기를 버텨낼 수 있었고 상담을 통해 삶이 변화되었다던 아이들의 말도 떠올랐다.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그들의 소식과 여전히 전해지는 감사 인사에 뭉클하게 웃음 짓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2년이라는 시간을 통해 내가 확인한 것은 상담이 나의 가치를 확인시켜주는 일이자, 내가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불현듯 상담이라는 것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와 함께 허우적 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여행에 가이드가 되어주는 일'이라 생각하면 어떨까?라는 질문이 머리를 스쳤다.


모든 이들이 나처럼 세상 밖으로 여행을 떠날 수는 없을 테니, 내가 그들의 세상 속에 들어가 자신을 찾는 여행을 함께 해준다면. 여행을 하며 방황하는 내 인생을 다잡았듯이, 상담을 통해 그들의 인생을 여행하며 방황하는 이들을 붙잡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상담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여전히 두렵고 떨렸지만, 이제는 잘해 낼 수 있을 거라는 그 어떤 확신도 없었지만. 기나긴 방황 끝에 나는 다시 한번 그 길을 가야겠다 다짐했다.


여행을 통해 나는 '나'를 만났다.   Copyright © 노콩 All Rights Reserved


제 꿈은 이제 돈 많은 백수가 아닙니다.

20대에 10년이란 시간 동안 꿈을 꾸고, 고, 다시 그 꿈을 잃는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꿈을 바라보며 사는 삶은 낭만적이기보다는 고단함에 가까웠다. 꿈이라 믿으며 쫓아오던 것이 이뤄졌을 때의 기쁨은 길지 않았고, 꿈을 잃고 난 뒤 느끼는 허무함은 깊었다. 꿈을 좇으며 사는 삶에 의문이 들 때마다 나는 넌즈시 돈 많은 백수를 꿈꾸곤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꿈이라는 것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도, 이뤄낸다고 해서 짠~하고 끝이 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이제 막 심겨진 작은 나무처럼 사랑과 정성을 들여가며 아름드리나무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키워나가야 하는 대상에 가깝다. 오랫동안 나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어 키워 온 나무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드리가 되어있었다.


나는 새로운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것은 '인생 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를 열고 싶다'는 꿈이다. 집을 떠나 세상에 나온 여행자들에게 아늑하고 사람 냄새 듬뿍 묻어나는 집 같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꿈. 나는 이제 막 내 인생에 심겨진 이 작은 꿈나무를 앞으로 정성껏 키워나가보려 한다. (그 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는 다시 시간과 에너지, 돈이라는 양분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열심히 일 해야지..)


그곳을 찾는 이들의 여행을 응원하려 한다. 쉼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깊은 휴식을,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위안을 건네주며 다시 여행을 지속할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삶의 방향을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멋진 인생여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좋은 가이드가 되어줘야지.


과연 이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이룬다면 언제가 될지, 이루기도 전에 나의 꿈이 바뀌어 버리진 않을지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 꿈의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애지중지 키워가다 보면 언젠가 그 꿈과 닮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는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터키 시인 나짐 히크매트-


더 이상 무얼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다시 상담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걸어야 할 길이 상담자의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될 때 비로소 다시금 무언가가 시작되는 역설을 따라, 나도 이 여행의 끝에서 또 다른 여행을 시작 해보려 한다.


삶에서 누구나 한 번쯤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들여다봐야 할 때가 찾아온다. 혹여 그런 때가 온다면 그게 언제가 됐든, 어디가 됐든, 방법이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꼭 자신 만을 위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지금 그런 시간을 갖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그 시간을 갖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나의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응원을 보낸다.



내가 그랬듯이, 그대들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직 심리상담자의 백수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편에 걸친 글은 놀랍게도 제가 앞으로 써나갈 이야기의 프롤로그였습니다.


매거진 [상담교사의 상담일지]에서는 상담자로 일하며 경험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 풀어나가려 합니다.

지금까지 4편의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본 매거진 구독을 저의 다양한 글들을 읽어보고 싶다면 저의 브런치 구독을 눌러주세요. https://brunch.co.kr/@duckyou-story

곧 다시 뵙도록 하죠. 땡큐.


아름다운 그림에 반했다면 일러스트레이터 노콩 Instagram로 GO : @rohkong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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