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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게 지내?' 라는 질문에...

상담교사의 치유일기 1 - 나의 하루 일과

오랜만에 몇몇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리고 늘상 그랬듯 오랜만이야, 잘 지내고 있지? 라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별 거리낌 없이 '나야 잘 지내지!'라고 대답했을 텐데 한참을 멍 때리다 '그냥 버티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구구절절이 적었다가, 말해 뭐하나 싶어 지워버렸다. 시원하게 잘 지낸다 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아쉬움에 씁쓸한 한숨이 나왔다.


학교에 들어온지도 벌써 8달이 지났다. 상담실을 오고 가는 아이들도 이제 고만고만하게 파악되었고, 업무며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딱히 죽을 만큼 힘들 일도 나를 미치도록 괴롭게 만드는 사람도 없는 평범한 하루하루의 일상 속. 분명 나는 크게 힘들어할 이유 없이 무난한 일상들을 지나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볼 때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어떻게 지내고 있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게 된 것은 누군가 내게 건넨 일상적인 인사 때문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상담실 전체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새로운 아침 공기를 맞아들인다. 티포트에 뜨거운 물을 끓여놓고 여러 가지 차들 중 그날의 기분에 맞는 티백을 골라 우려낸다. 머그컵에 차한잔을 담아 양손으로 감싸쥐고선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유튜브에 들어가 잔잔한 뉴에이지 음악을 켜놓고 업무수첩을 펼쳐 오늘의 상담일정과 해야 할 일들을 확인한다. 틈틈이 새로 접수된 공문들을 결재하고 간간히 예약된 상담시간에 맞춰 상담을 한다. 아이들은 나로 인해 위안을 받고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것은 내가 간절히 바라는 이상적인 나의 하루, 일과이다.
하루의 시작

문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저 멀리 상담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몇몇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는 커녕 계단을 올라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채 돌리기도 전에 아이들의 말문이 터진다. 그리고 어제 하교 후에는 어디를 갔고, 누구랑 싸운 것은 어떻게 되었으며, 엄마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말들을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쏟아낸다.


'응 그랬구나, 아이고 그랬겠네.' 별 다른 의미도 감정도 없지만 대답은 해줘야 할 것 같아 건성으로 이런저런 대답을 하다 보면 아침 조례 종소리와 함께 애들이 하나둘씩 제 교실로 사라진다. 아침 일과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엉망진창으로 시작되어버리기 일쑤고, 아이들이 푸닥거리며 낸 먼지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을 있는 힘껏 활짝 열어젖힌다.


1교시가 시작되기 전, 지각을 하거나 벌 청소를 하던 망나니들이 와당탕 상담실 문을 열어젖힌다. '아 쌤 좆됐는데요!' 다들 뭔 놈에 좆이 그렇게나 되는지 첫 번째 좆된 놈을 필두로 여러 명의 좆된 놈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한 놈은 담배를 훔치다가 걸렸고, 다른 놈은 그 술 담배를 하다가 사진이 찍혔고, 다른 녀석은 오토바이를 주워 타다가 차를 들이받았고, 또 다른 녀석은 그 오토바이를 뺏어 타다가 자빠져 온몸을 갈았다고 했다. '하....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고 사건 파악을 할라치면 이놈들은 어느새 도망가고 없다.


주로 내 아침은 '마음대로 들이닥친 아이들'과 '좆이 된 아이들'의 '막무가내' 이야기로 '우당탕탕' 시작된다.


일상의 모습

10분의 쉬는 시간이 6번, 60분의 점심시간이 2번. 그리고 하루 평균 1시간짜리 상담이 3건. 8시간의 근무시간 중 내가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6시간 가까이 된다. 쉬는 시간에는 평균 5명의 아이들이 상담실을 드나들고 점심시간에는 학년별로 1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상담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루는 날을 잡고 출입자 수를 카운트해봤더니 바를 정자(正)로 20개, 100명이 찍혔다. 100명이 1마디씩만 해도 나는 100마디의 말을 듣고 있는 셈이다.


1명이 1마디만 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이들이 쏟아내는 말은 시시콜콜한 질문과 이야기부터 안물 안궁인 무수한 TMI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무궁무진하다. '쌤, 있잖아요, 근데요, 왜요?'와 같은 말로 시작되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들은 보통 2-3명이 동시에 경쟁하듯 나에게로 퍼부어진다. 덕분에 내 고개는 이리저리 휘청이고 내 고막은 잠깐의 쉴 틈도 없이 계속 진동한다.


씨발, 지랄, 존나는 욕도 아니다. 모든 말의 시작과 끝에 붙는 접두사 혹은 접미사 같은 존재다. 개새끼, 소새끼, 씨발새끼, 좆같은 새끼와 좆만 한 새끼... 조용히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으면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새끼들은 다 만날 수 있다. '자살 마렵다부터 킹 받는다'까지 무슨 말인지 알듯 말듯한 기괴한 언어들을 이해하려면 한참의 버퍼링이 필요하다. 그런 아이들과 주구장창 대화하면서 나의 말투는 온갖 육두문자와 급식체로 점철되었다.  


교사가 된 지 8개월 만에 스멀스멀 그들을 닮아 가던 나는 중2의 언어습관과 행동양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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