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기를 타고 돌아갑니다

신혼여행이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요?

온 가족이 모여 팝콘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고 있던 어느 평화로운 저녁,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왔다. 그것은 터키 한인회로부터 온 '대한민국 국민을 위한 전세기' 소식이었다. 생각지 못한 뜻밖의 희소식에 기분이 설렌 것도 잠시, 전세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에 설렘은 이내 걱정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전세기를 탈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확인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국대사관에 문의하니 해당 전세기를 타기 위해서는 터키 내에서 유일하게 국제선 항공기가 운항 중인 이스탄불 신공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머물고 있는 안탈리아에서 이스탄불까지는 950km 가까이 떨어져 있는 상황. 혹시나 하는 맘에 안탈리아 공항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국내선 항공기를 알아봤지만 모든 항로는 이미 폐쇄된 상태였다.

현재 상황에서 이스탄불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차를 타고 육로로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편도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전을 내 부실한 몸뚱아리가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설사 버틴다 하더라도 코로나로 도시 간의 이동이 전면 제한된 상황에서 우리가 그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전세기를 타기 위해서는 눈앞에 무수한 산들을 넘어서야 했다.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은 비용이었다. 전세기 탑승권의 가격은 편도 1인 150만원으로 기존에 발권한 38만원짜리 항공권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5배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 했다. 마침 전세기 운항사가 일전에 예매한 귀국편 항공기와 동일한 항공사였기에 기존 항공 티켓과 교환이 가능한지 문의했다.


항공사에서는 해당 항공편이 한국 정부에서 마련한 특별 전세기이기 때문에 교환이 불가하다고 했다. 기존에 갖고 있던 티켓을 두고 다시 300이라는 큰돈을 지불하려니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항공편이 재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얼마를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우리는 전세기를 타기로 결심하고 항공권을 발권했다.


전세기를 타기 위해서는 이스탄불 공항으로 갈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해당 전세기를 전담하는 한국영사관에 연락을 취하니 협조공문을 발송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제한을 풀고 이동허가를 내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이스탄불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만 찾는다면 터키 정부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한국 대사관에서 발급한 협조공문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가장 먼저 해당 지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 함께 움직일 방법을 찾았다. 10인승 미니버스를 대여할 경우 4000리라(그 당시 한화 80만원)를 10명이 나눠서 지불하니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우리는 한인회 사이트에 공지문을 올리고 연락을 기다렸다. 그러나 대부분이 우리 같은 여행객이 아닌 터키 거주민이라서인지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다.


다음으로 찾아본 것은 렌터카였다. 업체에 문의하니 비록 편도일지라도 왕복 비용을 부과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들이 제안한 금액은 차량 렌트비 1000리라에 기름값 1000리라로, 당시 한국 돈으로 환산했을 때 40만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둘이 부담하기에 부담스러운 돈도 문제였지만, 사고 후 운전에 대한 공포가 극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단 둘이 낯선 길을 10시간이 넘게 운전해 갈 자신이 없었다.

며칠 째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며 이동 편을 알아보는 우리에게 아빠는 '자기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우리를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터키 현지인이 외국인을 공항에 데려다 주기 위해 이동허가를 받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아빠 차가 30년 동안 35만 키로를 달린 똥차였기에 선뜻 부탁할 수가 없었다. 나이 든 아빠가 혼자서 왕복 20시간의 운전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고, 무엇보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지금 우리로 인해 아빠가 코로나에 걸리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전세기 출발 3일 전까지도 뾰족한 수를 구하지 못한 우리는 아빠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셋이 함께 인근 구청을 찾았고 그곳에서 우리 부부와 아빠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이동 허가증을 발급받았다. 해당 이동 허가증의 유효기간은 고작 36시간, 아빠는 우리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36시간 안에 모든 이동을 완료해야 했다. 우리는 긴장된 마음으로 서둘러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가족들과 마지막 만찬. 도착할 때까지 받은 수십번의 검문
산 넘고 물 건너, 머나먼 이스탄불로

출발한 지 1시간, 이스탄불은 커녕 조금 떨어진 시골집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는 길에 차가 퍼졌다. 높은 산 길을 달리며 큰 화물차들을 추월하는 사이에 엔진이 과열되어 비상등이 깜빡였다. 갓길에 멈춰 서서 냉각수를 갈고 손을 보아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과연 이 차로 10시간을 달릴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이제 와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린 가야 했다.


시골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먼 길을 떠나는 우리를 위해 닭죽과 시시 케밥을 차려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만찬을 즐긴 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우리는 엄마가 만든 도시락을 싸들고 다시 길을 나섰다. 한 도시를 지날 때마다 검문을 위해 2-3번씩 멈춰 서야 했고 3시간 간격으로 휴게소에 들러 차를 손봤다. 마음과는 달리 끝도 없이 뻗은 지평선과 분홍빛으로 물든 석양이 야속하리만큼 아름다웠다.

긴장을 풀게 해준 터키의 아름다운 풍경

출발 한지 9시간째, 12시가 넘어가는 늦은 밤 불 꺼진 컴컴한 산길을 달리는 동안 나는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었다. 아빠는 네비를 켜놓고도 계속 다른 길로 향했고, 운전하는 내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큰 덤프트럭을 추월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반복했다. 나는 손으로 네비를 가리키며 '폰이 시키는 대로 가면 된다'고 거듭 설명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아빠에게 내 말이 들릴 리 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위험천만한 운전을 견뎌내던 나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의 고함에 당황한 아빠는 멀지 않은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아빠는 번역기를 돌려 '비싼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지 않기 위해 친구에게 물어 다른 길로 가는 중이었다'고 설명했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나는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고 있는 아빠에게 화를 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차를 타는 게 무서워서 그랬다며 아빠에게 사과와 용서를 빌었다.


10시간을 내리 달린 끝에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1년 전 여행에서 친구가 된 앤디가 호텔 문을 열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코로나로 모든 호텔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갈 곳이 없던 우리는 앤디의 도움으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잠시 몸을 뉘일 수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서 아빠의 이부자리를 봐드린 뒤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뜬눈으로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터키 반대쪽 가족 모두에게 우리 모두 무사히 이곳에 도착했노라 안부를 전했다.

우리에게 머물 자리를 내어준 고마운 앤디와 졸귀탱 아부지
집으로 가는 길

이른 아침 앤디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공항으로 향했다. 아빠는 '우리 아들딸의 친구는 자신의 아들과 같다며 다음번에 집에 놀러 오라'는 말로 감사를 표했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내리고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끌어안고 울던 우리는 서로의 안전을 빌어주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멀어져 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보내 준 사랑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의 무사 귀가를 기도하며 손을 모았다.


2달 만에 찾은 공항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공항 내부의 모든 상점이 닫혀있었고, 입국장에는 전세기를 타러 온 한국인들이 전부였다. 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던 공항이, 차가운 침묵과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게 낯설게 느껴졌다. 방진 마스크를 잔뜩 눌러쓰고 탑승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10시간 동안 아빠는 혼자서 집으로 돌아갔다. 함께 타고 온 차를 혼자 몰고, 함께 달리던 길을 되돌아가는 동안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돌아오는 내내 지난 2달 간의 터키 생활과 그곳에 두고 온 터키 가족들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그곳에 남겨진 이들에 대한 걱정과 그들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비행기는 날고 날아 한국에 도착했다.

40년 만에 이스탄불에 온 아빠, 그리고 뒷모습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건 곳은 한국에 있는 부모님이 아닌 터키 엄마 아빠 집이었다. 우리는 무사히 도착했노라 안부를 전한 뒤 아빠가 돌아오셨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의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심장이 옥죄이는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아빠도 무사히 도착했다'는 대답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사고를 당한 뒤로 '누구든지,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래서 사실 처음부터 아빠가 우리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차가 퍼지거나 사고가 나서 돌아가시게 될까 봐 많이 두려웠다. 그러나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아빠도 우리도 모두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많이 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너희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 다행이지만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자식들을 멀리 보내야 하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나는 우는 엄마를 달래며 모두 건강하게 지내다가 언젠가 이 코로나가 끝나는 날 다시 만나자 약속한 뒤 전화를 끊었다.


마치 공장을 가동한 듯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인천에서 부산까지 돌아오는 길은 터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만큼이나 멀고 삭막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 안도,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KTX안도 여느 여행길과는 달리 숨 막히는 침묵만 가득했다. 10시간의 비행과 3시간의 주행 동안 그 안에 타고 있는 어느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완연한 봄의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공항에서 받은 PCR검사 결과 두 시람 모두 음성이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2주 간 하루 두번 건강 상태를 보고하고 이곳저곳에서 보내준 과일과 음식들을 받아먹으며 집안에 머물렀다. 약속된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고, 다시 집 밖을 나서던 날엔 마치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듯 한 기분마저 들었다.


나의 2번째 신혼여행이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끝났다.


어쩌다 전세기를 타고 돌아오게 됐는지 궁금하다면-> https://youtu.be/bES-4BsNT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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