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간 머물기로 했던 터키에서의 일정이 기약 없이 늘어나면서 이곳에서 지낼 곳을 정해야 했다. 자신들과 함께 자기 집에 가자고 조르는 조카들을 보며 둘째 언니네에 따라갈까 고민하던 중, 아무 말하지 않지만 내심 자신들과 함께 가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표정을 읽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모님을 따라 시골집으로 내려가 터키 시골 라이프를 시작하기로 했다.
부모님 댁에서 신세를 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년 전 사고를 당했던 그때에도 온 가족이 부모님 댁에 모여 함께 지냈었으니까. 사고 직후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던 일주일 간은 물론, 퇴원 후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거진 한 달 반 가까이를 얹혀 지내며 극진한 돌봄을 받았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평온하고 안락했기에 나는 마치 고향집에 가는 것처럼 설레고 편안했다.
1년 전 신혼여행에서 사고를 당했던 날, 소식을 듣고 한 달음에 달려온 부모님은 장장 일주일을 병원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우리를 돌보셨다. 거동이 불편한 우리의 수발을 들며 식사를 챙기고 화장실을 드나드는 것은 물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엔 다 큰 우리를 씻겨 주기까지 하셨다.
서른이 넘어서 누군가의 손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은,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외국 노인에게 씻김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를 대하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손길을 통해 나를 향한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고, 그 덕에 나는 이내 긴장을 풀고 엄마에게 내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아빠의 사랑 표현 방식
병원 입원 초기에 나는 며칠 동안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메마른 호밀빵에 식욕이 달아났을 뿐만 아니라 향신료 향이 잔뜩 베어나는 토마토 국물의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지 못한 데에는 몸이 제 기능을 못했던 탓도 있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대한 심적인 충격이 한몫했던 것 같다.
며칠 동안 밥을 입에 대지 않고 멍하니 누워있는 나를 바라보던 아빠는 어느 오후 조용히 나를 데리고 병원 밖을 나섰다. 서툰 거동으로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병원 근처의 한 케밥집. 아빠는 얇게 썰어서 나온 고기 몇 점을 빵에 싸서 건네며 '이걸 다 먹으면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노라'고 나를 회유했다.
다 큰 어른에게 아이스크림이 웬 말인가 싶으면서도 내심 나에게 뭐라도 먹이고픈 아빠의 마음이 고마워 꾸역꾸역 음식을 씹어 삼켰다. 그 뒤로도 나는 아빠와 아무도 몰래 몇 번이나 더 병원 탈출을 감행했다. 마트에서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집어담는 순간이 아이처럼 즐거웠고, 아빠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그 길이 참 행복했다.
사고 당시 병원에서 처음으로 함께 찍은 사진
엄마의 헌신적인 희생
집으로 돌아온 뒤 엄마는 몸져누운 환자 셋에 본인의 식구들까지 거진 10명이 넘는 사람들의 뒤치다꺼리를 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 식구들의 세끼 밥을 챙기고 빨래를 돌리고 집안일을 하면서, 정말 한시도 쉬지 못하고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거북이마냥 둥글게 굽어있는 엄마의 등이, 두껍고 투박하게 뒤틀린 엄마의 발이, 거칠게 터 갈라 지고 마디가 굵어진 엄마의 손이 그간의 고생스러운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모두가 병원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혼자 병실에 누워 사경을 헤매는 손자 걱정에 엄마는 매일 밤 숨죽여 울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아리고 참으로 아팠다. 과로로 눈에 핏줄이 터져 병원을 오가면서도 가족들에게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는 엄마의 헌신에 뭐라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던 나는 매일 저녁 하루 일과가 끝나고 앉아있는 엄마에게 다가가 깁스를 찬 팔로 서툰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것이 뭐 그리 도움이 됐을까마는 나의 서툰 몸짓에 담긴 마음을 느낀 엄마는 늘 '너무 좋다, 시원하다,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엄마와
사실 나는 한국의 부모님에게 그리 살갑지 못한 딸이다. 경상도 사람인 데다 맏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마음과 달리 무심하게 표현할 때가 많다. 명절이나 생신일 때를 제외하고는 평소에 연락도 잘하지 않거니와, 얼굴을 보고 대화할 때면 괜히 더 어색해서 무뚝뚝하게 말하곤 한다. 20살 이후로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물론, 서로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이야기조차 살뜰히 나눠 본 적이 없다.
그에 반해 터키에서 가족들과 지낸 1달 반의 시간은 내가 독립한 이후 지난 10년 간 우리 가족과 보낸 시간보다 훨씬 길고 깊었다. 하루 온종일 3끼를 함께 먹고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 데다, 사고로 망가진 몸 때문에 그들에게 온전히 의지해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고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수용해주었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의 나는 그 어떤 누구 앞에서보다 더 나다운 모습으로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내게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고 부모님보다 더 부모 같은 존재가 되었다.
1년 전 우리 그리고 다시 만난 우리
우리나라에 비해 스킨십이 자연스러운 터키 문화도 서로 간의 애정도를 높이는데 큰 몫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포옹과 볼 키스를 나누는 동안 우리도 점차 어색함 대신 익숙함을 느끼게 되었다. 눈 뜨자마자 건네는 좋은 아침이라는 말에도, 외출했다 돌아와 하는 짧은 인사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 나누는 잘 자라는 말에도 이렇게 많은 마음을 담아 전할 수 있다는 걸 왜 한국에서는 몰랐을까 싶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를 가깝게 만드는데 되려 도움이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를 표현하기 위해 온몸과 표정을 사용해야 했고, 그런 나의 모습을 가족들은 마치 해맑은 어린아이처럼 봐주었으니 말이다. 이제 갓 말을 배우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하든 반갑고 신기하듯, 그들은 내가 짧은 터키어로 말을 할 때마다 자지러지게 기뻐해 줬다.
그 덕에 남편과 나는 마치 그 집의 막내아들과 딸이 된 듯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말을 배워 나갔다. 나이 서른에 어른들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사랑을 받게 될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서 부모님과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될 줄 몰랐다. 정말이지 내가 이곳 터키에서 살면서 평생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랑을 이렇게 차고 넘치도록 받게 될 줄은 몰랐다.
1년 전의 나는 교통사고로 인해 신혼여행을 망치고 몸이 망가진 것에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 사고가 일어난 것에 대해 슬프고 화나고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고로 인해 두 번째 고향과 가족을 갖게 된 것을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느낀다. 언젠가 엄마가 내게 했던 '너희를 보내준 신에게 감사한다'는 말처럼 나 또한 그들을 보내준 신에게 감사한다.
사고는 내게서 정말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것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삶이 계획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은 인간을 몹시 좌절시키고 절망하게도 하지만, 또한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희망을 품고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무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섣불리 절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생각지 못하게 주어질 무언가를 희망하고 기대하는 것이지 않을까?
멋진 그림으로 글에 숨을 불어넣어 준 일러스트레이터 노콩님께 감사하며 [ Instagram :@rohkong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