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기

왜 꼭 그래야 해요?

by 은호씨

어스름한 저녁이었다. 12살인 어린 ‘나’는 키가 이만큼 자란 게 자랑스러웠을까. 까치발을 하고 엄마 물건만 들어있는 가장 높은 서랍을 열었다. 거기서 발견한 ‘엄마의 일기장’은 나에게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나중에는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으로 시작한 이 행동은 ‘내 불안의 시작’이었다.


부모님이 자주 싸우시는 것 같았지만 문제가 그토록 심각한지 몰랐던 나는 우리 집안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담긴 그 일기장을 탐독했고, ‘엄마의 자살 생각’에 대한 대목을 본 뒤에야 멈출 수 있었다. 그날 이후였던 것 같다. 내가 밤중에 깨서 엄마 코에 손가락을 대보기 시작한 것은.


다 큰 여자애가 밤중에 소변 실수를 하기 시작했고, 종종 자다 깨면 내가 거실에 멍하니 서 있어서 그자체로 무서웠던 날들이 쌓여갔다. ‘몽유병’이라며 엄마는 점까지 보러 다니는 것 같았는데, 나는 엄마에게 하나의 ‘짐’을 더 얹어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난 엄마가 죽을까봐,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상담 중에 떠오른 이 기억은 벌써 28년 전의 기억인데도 너무도 생생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서랍장의 높이, 일기장의 색깔, 그 촉감, 당시 집의 바닥 느낌 같은 신경이 기억하는 정보가 다시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살면서 불안이 심해서 불면증을 겪을 때마다 나는 굉장히 비슷한 패턴으로 밤 중에 거실을 걷곤 했다는 걸.


4회기를 시작하며, 상담사님은 상담이 중간을 향해 가고 있으니 조금 어떠신지 소회를 묻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살짝 회의적인 어투로 ‘내 불안이 어디서 왔다는 걸 아는 게’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절박한 외침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어야 했다.


상담사님은 그런 마음이 들 수 있다며 충분히 나를 공감해 주었고, 자신의 어려움을 직면하는 일이 누구에게나 어렵다며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었다. 나와 상담사님은 비슷한 연배로, 꽤나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조금 안도감이 들었다. 특히 엄마에 대해 느낀 감정이나 죄책감 등이 비슷했다.


상담사님은 엄마가 사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엄마가 필요하다는 제품을 사주고 부담스러워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나 또한 최근 결혼 10주년 해외여행 계획을 짜다, 여행 전 주에 친정에 들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솔직히 너무 더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여행 전에 친정에 가서 엄마랑 맛있는 것이라도 먹어야 맘 편히 여행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왜 꼭 그래야 해요?


상담사님은 엄마께 양해(?)를 구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면 안된다는 나에게 ‘왜’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대답을 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그에 대한 대답은 상담사님의 입에서 바로 나왔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죄책감, 엄마에 대한 미안함 등’이란 것을 아마 나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상담사님은 내 기준에서 봤을 때, ‘하면 안 되는 어떤 행동들을 어렵더라도 한번 눈 딱 감고 해 보는 연습’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욕을 먹더라도, 비난을 받더라도. ‘그래도 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구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배짱을 키울 수 있을 터였다. 듣는 순간 알 것만 같았다. 이것는 내 평생의 숙제가 될 거라는 걸.


상담 말미에, 상담사님은 내가 상담 중 종종 책임감이 버거워 ‘이대로 죽으면 모든 것이 편해지겠지.’와 같이 말하는 부분이 걱정스럽다고 하셨다. 상담 중 정신과 진료를 권하는 기준에는 ‘자살 사고’가 있는데, 내가 하는 생각들은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스스로를 포기하는 ‘수동적 자살 사고’로 보인단다. 다만, 이에 대한 부분을 내가 인지하고 조금 돌아보길 바란다며 이날의 상담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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