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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Feb 13. 2024

그 많던 버드나무는 어디 갔을까 2

흥남 철수 이야기

    따뜻한 날씨에 사방이 온통 초록인 데다 새로 이은 노란 초가지붕 때문이었다. 당시 거제도는 전쟁의 포화가 닿지 않는 인구 7만 명의 평화로운 섬이었다. 거제도에는 이미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도착하기 전, 부산에서 입항이 거절된 10만에서 15만여 명의 피란민이 쏟아져 들어와 섬은 순식간에 피란민 촌이 됐다.

  그러나 거제도 주민들은 피난민들을 배척하지 않고 품어주었다. 주민들의 집에 얹혀살게 해 주거나 자신들의 산과 논에 판잣집이나 움막을 짓도록 허락했다. 집이라 봐야 소나무 가지와 대나무에 진흙을 발라 흙벽 집을 짓고 미군 전투식량 시레이션 껍데기나 깡통을 펴서 지붕을 만들었다.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는 상황에서도 피난민들은 ‘천막 학교’를 세워 아이들의 교육을 이어갔다. 당시 거제도에는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교육받은 부모나 자식을 가르치는 이도 거의 없었던 반면 교육 도시였던 함흥 출신 피난민 중에서는 교직 생활을 하던 이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2년 뒤 젊은 사제 박문선 신부가 장승포에 ‘해성 중학교’를 설립하자, 주축이 되어 함께 운영해 나갔다. 초창기에는 학교에 주로 피난민 자녀들이 다녔지만, 점차 거제도 주민들의 자녀도 입학했다.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품어준 대가로 거제도는 다른 섬에 비해 빨리 교육에 눈뜨게 되었다.     


  피난민들은 의외의 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바로 그곳은 1951년 2월에 생겨난 ‘포로수용소’였다. 철조망을 사이에 둔 피란민들과 포로들 사이의 거래는 끊이지 않았다. 당시 미군 측에서 수용소에 미제 물품을 지급했는데 포로들이 옷, 담요 등 군수물자를 내놓으면 피란민들은 엿이나 떡부터 통돼지까지 구해다 주었다. 그중 피난민에게 가장 인기 있는 물건은 PW(Prison of War, 전쟁포로)가 흰 물감으로 쓰여 있는 군복이었는데 피란민들은 그것을 염색해서 시장에 팔았다. 여기서 돈을 번 사람들은 부산에 가서 ‘깡통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15살 때 학교 갔다 오는 길에 피난민 행렬에 휩쓸려 혈혈단신 배에 올랐던, 지금은 미국에 거주 중인 함흥 출신의 88세 이지연 씨는 묘지를 사두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죽으면 동해에 뿌려달라고 딸에게 말했다. 죽은 뒤라도 함흥 반룡산 아래 청청한 버드나무가 많았던 고향에 가고팠기 때문이다.

  1940년생으로 함경남도 함흥시 낙민리가 고향인 이장영 씨도 북에 일가가 있다. 흥남 철수 당시 연로한 부모님은 집에 머물기로 하고 일곱 자녀만 새끼줄로 묶어 흥남부두에 도착해서 아홉 식구가 모두 배에 탔다. 그러나 고향에 다시 가보지 못한 채 거제도에서 눈을 감았던 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꼭 찾아가라며 북의 고향 주소를 비석에 새기게 했다.           


  작년 말 통일부에 이산가족으로 등록된 인원은 누적 13만 3천 970명이며 그중 9만 3천871명이 숨져 4만 99명만 생존해 있다. 이 가운데 90세 이상이 29.8%, 80대는 35.9%에 이를 정도로 이산가족은 사실상 '초고령화' 단계에 돌입했고 한 달에 약 300명의 이산가족이 사망하고 있다. 남과 북의 흩어진 가족은 편지나 만남은 고사하고 생사확인도 못 한 채 세상을 뜨고 있다. 정부는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의 갈급함을 인식하고 5년 동안 닫힌 상봉의 장을 속히 열어야 한다. 

  국민 다수는 분단 상황에 내성이 생긴 지 오래다. 이산가족이 헤어질 때 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 장면을 보아도, 국군 포로가 아오지 탄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탈북했다는 뉴스를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다. 당장 필요한 것은 둔감함에서 깨어나 동포의 아픔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들의 피눈물이 떨어진 곳에 지금의 이 평화가 피어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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