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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Sep 02. 2024

아내의 첫인상과 나의 첫인상

장정일의 시와 최승호의 시를 닮은....

  나에 대한 아내의 첫인상은 술만 마시는 무서운 선배였다. 1991년 가을, 학생회관 4층에서 공대로 연결되는 통로를 걷는 중에 엄마의 반지를 훔쳤고, 오늘 그걸 맡기고 술을 마실 거라는 내 이야기를 들었다, 고 한다. 나는 당시 김영승의 시 <반성 16>과 같은 삶을 살았다.


  반성 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아내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똑똑하면서도 유니크한 후배였다. 1991년 가을, 학생회관 4층에서 공대로 연결되는 통로를 지나면 나오는 세미나실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발표하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긴장도 하지 않고 책상에 놓인 자료를 보지도 않고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순서를 채우는 아내가 인상적이었다. 똑 부러지면서도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말하자면 장정일의 시 <프로이트식 치료를 받은 여교사>에 등장하는 여교사 같았다.


   프로이트식 치료를 받은 여교사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료 교사 중에 나를 무척 사랑했던 총각 선생님이 계셨지요.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은 건 아니었구요. 어쩌면 우린 잘 될 수 있었고, 그가 그 말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린 부부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요. 글쎄 그가 무슨 말을 했는가 하면, 다짜고짜 나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나는 그즈음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그가 사랑한다고 한 순간, 대체 그가 사랑한다는 그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어요. 그는 누구에게 대고 사랑을 고백한 것일까요?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뻔뻔스런 낯짝을 갈겨 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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