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호영 Apr 15. 2024

운동화 끈이 풀렸다

아이슬란드여행 중에 들른 레이캬비크 칼디바




운동화 끈이 풀렸다. 끈이 풀린 것도 모르고 한참을 걸었는지 끝이 조금 더러워졌다. 운동화 끈을 묶으면서 생각했다.


“지금 누가 내 생각을 하고 있나?”


운동화 끈이 풀리면 누군가가 내 생각을 할 거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웃는 사람. 사랑과 낭만을 믿는 사람. 그런 나는 해가 지나며 조금 변했다. 여전히 사랑과 낭만을 믿지만,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며 돌연 이성을 되찾곤 한다. 덜 상처받고, 덜 운다.


이러한 성향 변화는 여행지에서도 곧잘 나타났다. 간혹 나타나는 낯선 나의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예컨대, 처음 만난 여행자에게 활짝 웃으며 '안녕!'이라고 손 흔들어 보이거나, 어떤 무리에게 다가가 '너희도 여행 중이니? 어디에서 왔어?'라고 대화를 시작하거나, 술집에서 옆 테이블에 다가가 다짜고짜 다트 게임 내기를 하자고 했던 나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먼저 인사를 했다가 답이 돌아오지 않았던 기억과 혹시 이건 인종차별의 행동이 아닐까, 같은 어쭙잖은 생각에 지배당해 조용히 커피를 한 잔 마시는 나의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하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비롯된 부정적 감정이 '인지 왜곡'을 낳은 결과라는 말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어쩌다 쌓인 부정적 경험이 인지 오류를 가져온달까?






책을 여러 권 쓰고, 강의를 하고, 블로거 활동 같은 대외적인 활동을 하다 보니 가끔은 유명세를 치를 때가 있다. 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 책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들도 있다. 과거 나의 모습은 내가 봐도 자랑스러울 때가 있지만, 내가 봐도 부끄러울 때가 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이 모든 이력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남고, 지면에 문장으로 남을 때, 가끔은 벅찰 때가 있다. 인터넷 신문에 나의 여행과 블로그 이야기가 올라갔을 때 받은 엄청난 댓글 세례, 소셜미디어에 올라 온 10개의 좋은 말 중에 1개의 나쁜 말에 집중하여 부정적인 사고에 사로잡히기도 했던 일 등이 그렇다.


첫 책 출간 후에 받아 본 첫 악평에 울어버린 기억이 있다. 여행 중이었고, 푸른 바닷바람에 흠뻑 행복했던 날이었다. 테라스 문을 열면 멀리 보이는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려는 찰나, 습관처럼 책 제목을 검색하다가 발견한 악평이었다. 다짜고짜 '이 책은 읽은 책 중 최악의 책'이라는 문장이 극장에 걸린 타이틀처럼 커다랗게 보였다. 하루 종일 행복했던 기억이 사라지고,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어디서 난 용기인지 그 사람에게 되물었다. '어떤 부분을 고치면 좋으면 좋을까요. 다음에 반영할게요.' 그 사람은 '가이드북처럼 충분한 정보가 없는 에세이라서 싫었다'고 답해주었다. 허무했지만, 안심되었다. 내 책은 가이드북이 아니라 에세이였다. 옆에서 제이가 말했다. 오늘 행복했던 기억이 99%로 가득 차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고.


신문 기사에 쌓인 악플이 뒤로 밀릴 정도로 좋은 댓글이 쌓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뒤로 가서 악플을 읽고 또 읽곤 했다. 1%의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있던 나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기억하려고 했던 것 같다. 더 발전해 보자. 겁쟁이가 되지 말자. 성장의 발판으로 삼아보자.



이러한 기억들이 여행지에서 '나 자신이 되기'를 방해할 때,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나는 맑고, 밝고, 청량하게, 크게 웃던 사람이었는데 이젠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면 조금 슬퍼졌다.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사랑한다는 칼디 맥주와 아이슬란드 빙하로 만든 진토닉 칵테일을 파는 <칼디바>에 들렀다. 어느 여름이었고, 여름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한껏 멋을 부리고 외출할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두꺼운 옷을 입지 않아도 되고, 어두워지는 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북적북적한 펍 안쪽 구석에 테이블 하나가 비어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bar에 비집고 앉아서 바텐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옆에 앉은 여행자들과 대화를 이어갔겠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 흥이 채 가지 않은 채로 잠에 들고, 미세한 숙취와 함께 다음날 여정을 이어가는 일은 이제 원치 않았다. 작은 수첩을 꺼내어 그날의 기분을 적어보기도 하고, 구글 지도를 열어 우리가 지나온 자리를 되짚어보기도 했다. 제이와 나란히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서로의 마음을 들어보기도 하면서.


이 또한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된 것도 여행을 통해서였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나에 집중할 필요도, 어떠한 단면을 무조건 치켜세울 필요도 없이, 시간이 흐르는 대로, 경험치가 쌓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걸 배웠다. 끊임없이 나를 찾는 여정. 그 안에 나의 여행이, 우리의 여행이 있어서 다행이야.


<칼디바>에서 찍은 우리의 사진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멀찍이서 찍은 바(bar)의 전경 사진도 영화 같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 남는 여운도 깊다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다.





이전 07화 아이슬란드 고양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