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그림을 보고
대학생 때부터 고흐를 좋아했었다. 내가 언제부터 고흐를 알게 되었고, 무엇 때문에 좋아하게 됐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고흐를 왜 좋아하는지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고흐가 정확히 나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예술성과 천재성을 닮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 거부반응, 그리고 홀로됨. 이런 것들이 나와 닮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더욱 애달픈가보다.
런던 내셔널갤러리에서 처음으로 고흐 그림을 봤을 때는 그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화려한 색감과 생생한 붓의 터치가 괜히 대화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해바라기>,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밀밭>, <빈 의자> 작품을 나란히 감상하면서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정말 입이 절로 턱하고 벌어졌다. 평면의 사진으로 봤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의 전율을 실제로 보니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생각이 고흐에 대한 연민으로 바뀐 것은 코톨드 갤러리에서였다. 그곳에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감상했다. 천재 화가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를 만큼 내면이 불안정했고 세상과 불화했다. 고갱과 싸운 뒤 면도칼로 귀를 잘랐다고 하는데, 문득 내가 대학 시절 동기언니와 싸운 일이 생각났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언니의 말 한마디에 내가 감정을 주체못하고 격분했던 일이 떠올랐다. 상황은 떠오르지 않지만, 감정은 생생한 그 때의 일들. 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고흐는 고갱과의 불화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기에 자신의 귀까지 자르게 된 걸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사람은 인정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 동기 언니와의 과거의 일, 고흐와 고갱의 문제도 결국 인정받지 못한 데서 오는 서글픔이 아니었을까? 나라는 존재의 무가치함, 내가 이 세상에서 조금도 쓸모없다는 믿음, 버려질 수도 있다는 절망감이 분노로 탈바꿈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의 불안감이 그런 난폭한 언행으로 이어졌던 건 아닌지. 물론 연민이 든다고 해서, 그런 모든 언행이 잘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의 전환을 통해 타인의 행동은 제지하면서도 그의 감정을 어루만져줄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를 탓하기 위함도 아니고, 책임회피를 위한 것도 아닌, 다만 따스한 손길을 기대하는 가녀린 마음일 뿐이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감상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의 고독이나 외로움이 아닌, 그의 꿈과 낭만, 이상이 느껴진다. 고흐가 귀를 자르기 전에 그린 그림인데, 고흐에게 마냥 쓸쓸하거나 불안정한 감정만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물론 살아생전 작품을 단 1점밖에 팔지 못했을 정도로 빈궁하고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았지만, 그에게는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이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느껴지는 감상처럼 가슴 한 쪽에서는 꿈과 희망을 품고 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렇다. 외롭고 쓸쓸한 와중에도 한 쪽에서는 내 미래에 대한 열망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결국 내가 고흐를 좋아하는 것도 나와 닮은 특성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해주는 무언가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나는 더욱더 고흐를 사랑하고,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과 그의 인생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럴 때 나는 더 이상 혼자여도 혼자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