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하기 증후군과 용기를 내는 일
엄마는 누누이 직장인보다 백수가 과로로 쓰러질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셨다. 엄마 말씀이 맞았다. 최소한의 경제생활을 하며 거의 백수(이게 백수가 맞는지 모르겠지만)로 지내던 나는 그새를 못 참고 또 과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결국 나는 알바와 글쓰기로 주 6일 노동을 자처했다. 당연히 금방 지쳐버렸고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삶의 무게에 다시 짓눌렸다.
쉼이 필요했다. 브런치 스토리에 하던 모든 연재를 멈췄다. 잘 다니던(?) 카페 알바도 손목 부상으로 때려치웠다(그 일을 때리고 치우고 싶긴 했나 보다). 2박 3일 애인과 여행을 갔다 왔고 그 순간만큼은 내 삶의 걱정과 불만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 백수로서 부지런하지 못한 내 모습에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놓지 않았던 것은 바로 다소 위협적이었던 소설 입문반 수업. 학원까지 지하철 30분과 도보 20분이 걸리는 약 1시간 거리의 수업이었지만, 매주 가는 길이 그렇게 설렐 수가 없다. 등단을 목표하시는 분들이든, 그냥 취미로 하시는 분들이든, 아니면 나처럼 진짜 초보라서 배우고 싶은 분들이든, 수업을 같이 듣는 14명은 모두 다 글 쓰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내는 활자와 이야기를 사랑했고 쓰는 사람의 마음으로 서로의 글을 대했다. 다들 이력이 화려해서 나는 주눅 들어 위협적이라고 했지만 그 어떤 쿠션보다 폭신한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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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사람은 형성된 성격을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얼마 전 유튜브에서 뇌과학 전문가가 말하는 걸 넋을 놓고 봤다. 특히 서른이 넘은 사람은 바꾸는데 20대 초반에 비해 두 배로 어렵다고. 나도 만찬가지였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알 수 없는 비교하기 증후군(한국인이 대부분 앓고 있는 고질병)이 발동되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14명 중 잘 쓰는 사람(철저히 내 취향)은 누가 있고, 못쓰는 사람(철저히 내 취향이 아닌)은 누가 있는지 살폈고 그 사이에 나는 어디쯤 껴 있을까 순위를 매겼다. 이 저주받은 비교하기 증후군은 나를 불행하게 했다.
비교하다 보니 서로의 글을 읽고 소감을 말하듯 피드백을 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사이에도 미묘하게 부럽고 질투 나는 사람들이 생겼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소재를 가져오는 사람, 필력이 너무 좋아 전혀 초보가 아닌 듯한(선생님께도 당장 신춘문예에 지원하라고 잔소리성 칭찬을 듣는) 사람, 피드백을 줄 때 너무 글을 잘 파악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사람. 글 쓰는 동료를 만들고 싶어 온 수업에서도 경쟁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보다 몇 배의 시간(과 수업비)을 투자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나 스스로를 작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재능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 타고난 잠재력이 나에게 없는 것 아닐까 의심이 들 때. 혹은 내가 남들보다 뒤처진다고 느낄 때. 그럴 때 나는 어김없이 포기할 생각을 했다.
몇 주 전 일이다. 수업 전날 새벽에 마친 알바로 인해 쏟아지는 잠을 겨우 이겨내며 침대를 빠져나와 수업에 갈 준비를 할 때였다. 샤워를 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옷을 입었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까지 포근함을 주던 침대를 바라봤다.
그냥 오늘은 가지 말까…?
전날의 피곤함도 큰 몫을 했겠지만 오늘은 하필 내가 쓴 소설을 합평받는 날이었으니 그것 또한 두려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지.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화장실에 가서 외출준비를 마저 했다.
내가 합평받는 날에 수업을 빠진 수강생은 4명이 있었다. 그들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지 알 수 없지만 수업을 빠지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등단 소설가이신 선생님의 밝고 유머러스한 농담을 시작으로 합평이 시작되었다.
앉은자리 나 순서에 상관없이 수강생들은 내 글을 읽어보고 느낀 전체적인 감상평과 좋았던 점, 개선되면 좋은 점을 열심히 나열했다. 어떤 사람은 문장이 매끄러워 술술 잘 읽힌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내 주인공이 에겐남 같다고 했다(정확히 내 의도를 파악해서 놀랐다). 어떤 사람은 소설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세계관이 흥미로우나 미흡한 부분을 이렇게 보완하면 어떨까 의견을 내기도 했다. 마지막 선생님의 종합적인 평가 및 이론 설명까지 끝나고 나니 내가 쓴 11장 분량의 단편 소설이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느껴졌다.
나는 피드백을 열심히 적으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과연 내가 소설이나 글쓰기에 자질이 있는 건지, 타고난 재능이나 감각이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으로 살아가고 싶은데, 과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소설 입문반 수업을 듣는 14명의 사람 중에도 글을 뛰어나게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비교를 하며 나는 다시 작아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이 한강을 건널 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문학천재가 아닐 수도 있지.
글을 한국에서 제일 잘 쓰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
잠재력이나 재능이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문학인 같지 않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나에게는 용기가 있잖아.
오늘 아침 다시 침대로 돌아가지 않고 수업을 들으러 간 용기가 있잖아.
위협적인 소설 수업에서 나는 다시 한번 (고질병인) 비교를 했지만 그걸 이겨내는 건 나의 용기였다. 한 번을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듣고 있고 아무리 피곤해도 수업에 갔다. 뜻밖에 나의 재능은 두려워도 용기를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다섯에 직업을 바꾸는 용기, 나를 지키기 위해서 회사를 퇴사하는 용기,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 정신과를 제 발로 찾아가는 용기, 나의 부족함을 직면하기 위해 소설 수업을 가는 용기.
그래. 그렇다면 용기를 내야지.
계속 글을 써 내려가야지.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동해야지.
나는 그 마음으로 그다음 주에도, 그 다다음주에도 용기로 위협적인 소설 입문반 수업에 참석했다. 글을 쓰고 있는 현시점으로도 아직 4번의 수업이 남았지만 나는 모두 참석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나의 재능은 용기를 내는 것에 있으니까. 두려워도, 도망치고 싶어도 용기를 내는 재능이 있으니까. 그렇게 용기를 내가 보면 언젠가 나도 내가 질투하고 부러워하던 사람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