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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8일 (금) - 1

첫 대접 : 매년 김장 하시는 엄마께

by 재민

어제부터 김장 노동을 위해 할먼네(할머니 댁)에 머물고 있다. 할먼네는 1991년에 완공된 나와 동갑내기 시골집이다. 겨울에는 외풍이 집안에 들어오고 달빛도 없는 밤에는 사방이 깜깜해 창문 밖을 보기 무서운 그런 집이다. 이 시골집에 노동자 둘이 있었으니, 바로 올해의 김장 노동자인 나와 엄마였다. 아빠와 누나는 불참이고 할머니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시니 엄마는 올해 김장은 둘이서만 하자고 하셨다.


이미 어제 오전부터 김장은 시작되었다. 두 명뿐인 맨파워 덕분에 배추는 전년보다 열 포기 적게 했지만, 배추는 그 어느 해보다 크고 풍성하게 자라 일이 줄었다는 걸 채감하지 못했다. 어제는 배추를 뽑아 절이고, 김칫소 재료를 다듬고 썰었다. 그리고 오늘은 꼭두새벽같이 일어나 김칫소를 만들고 버무렸다. 설렁탕 국물을 우리듯 깊고 진한 12시간 노동을 거쳐 김장 김치가 만들어졌다.


올해는 적은 배추 포기 수였지만(배추 포기 수만큼 포기 하고 싶었다) 매년 다를 것 없이 오전 11시가 넘어 김장이 끝났다. 고된 노동 끝에 기다리고 있던 건 엄마표 수육이었다. 야들야들한 수육 한 조각을 매콤 칼칼한 고춧가루 향과 짭짭한 젓갈 향이 코를 찌르는 새빨간 김칫소와 함께 먹으면 힘들었던 지난 12 시간은 할만했다는 듯 미화 돼버린다. 그래도 고생한 것을 생색내려고 집을 지키고 있던 누나에게 ‘NO 김장 NO 수육’을 국회의원이 선거 유세하듯 당당하게 외쳤다. 나의 장난과 다르게 엄마는 수육을 플라스틱 통에 이쁘게 담아 엄마 집으로 가져가셨다.


엄마 집에서 ‘NO 임신 NO 조카’를 외치던 누나는 엄마께서 싸 온 수육을 한 입 크게 먹고 기쁨의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미간이 좁아지고 눈에 주름이 생겼지만 상관없어 보였다. 이런 게 값진 대접이 아닐까? 오랜 시간에 걸쳐 배추와 무를 기르고, 12시간 넘게 김치를 만들고, 한 시간 넘게 고기를 삶고, 15분을 차로 달려 가져온 김장 김치와 수육은 맛있는 음식일 수밖에 없다. 김장 김치와 수육을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과 같이 식사하며 맛에 공감하는 나. 단순히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닌, 맛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요리가 결국 대접인 것 아닐까? 누나를 따라 수육 한 점을 한 입 크게 먹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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