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 규칙 없음
‘제천 아파트 신축공사’ 프로젝트를 하다가 갑자기 ‘하남 재활병원 현상’으로 배치되어 버렸다. 일단 글로벌 본부에서 해야 한다고 회사 윗선에서는 정해버린 것이다. 정작 우리 본부에서는 인원도 부족하고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도 있다 보니 급하게 빼낼 수 있는 인원들만 모두 빼내어 현상에 배치했다. 같이 프로젝트를 하던 김 부장님과 내가 이 프로젝트 투입되었어야 했던 이유는 현상 시작 몇 주 전 제천 프로젝트의 사업계획승인이 끝나 시간적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각 팀에서 한두 명 그리고 신입사원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본부 자체가 경험이 별로 없는 병원 설계를 해야 했으니 다들 걱정을 안고 현상을 시작했다.
나는 보고서와 CG 이미지에 참여했는데, 2년 차 사원이다 보니 두 가지 파트에서 동시에 일했다. 어느 날은 스케치업 모델링을 하다가, 어느 날은 보고서에 들어갈 다이어그램을 만들곤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익숙한 일들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힘들지 않았다. 현상 인원은 다들 눈치를 보면서 야근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지만, 그만큼의 일이 없어서 야근도 많이 안 했다.
현상 공모 주최 측에서 보고서를 20 페이지 이내로 만들라고 했기 때문에 페이지 수가 한정이 되어 있었고, 계획이 어느 정도 나올 때까지는 사실상 야근이 불필요했다. CG 이미지 상황도 비슷했다. 계획과 입면 디자인이 나오지 않으니 모델링을 빠르게 할 필요가 없었고, CG 이미지 같은 경우는 예산이 부족해서 몇 장 찍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일의 양도 많지 않았다. 2주 정도 지나니 현상의 하이라이트인 마감 바로 직전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래도 주말 출근은 해야 할 것 같았고 보아하니 마지막 하루, 이틀 정도만 늦게까지 일하면 특별히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경험상 이렇게 순탄하게 가면 판도를 뒤집는 복병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게 없었던 게 ‘하남 재활병원 현상’이었다. 보고서는 미리 준비했던 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보고서 내용이 최신 병원 현상 아이템들을 짜깁기해놓은 것이기 때문이었고 설계 계획에 맞춰서 내용만 수정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CG 업체도 걱정과 다르게 협조적이어서 업체를 한 번밖에 방문하지 않고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순탄하게 가는 듯 보였지만 사실 본부 이곳저곳에서는 디자인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순탄하게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결정권자의 말을 잘 들어줬기 때문이었다. 입면 디자인은 본부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 되어서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 입면이 나왔다. 물론 덜컹하는 마음에 김 소장조차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본부장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어서 꺾을 수가 없었다. 보고서도 토씨 하나하나 본부장 입맛에 맞춰야 했다. 막바지에는 본부장을 제외하고 경력이 가장 높은 1팀 소장이 직접 본부장이 말하는 문구를 받아적고 글자 하나하나를 수정하기도 했다. 정말 사소한 것까지 본부장은 컨트롤하고 있었다. ‘아, 저 정도의 연차가 되어야 저렇게 할 수 있겠구나’. 그게 한 25년은 걸릴 것 같았다.
씁쓸했다. 내가 20년 후는 돼야 본부장의 명령에 따라 보고서 한 글자를 바꿀 수 있고, 그 후 몇 년은 더 흘러야 내가 마음대로 보고서를 쥐락펴락 할 수 있겠구나. 다들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결정권을 가지려면 꼰꼰 건축이든 어디든 25년은 해야겠구나 어렴풋이 짐작했다.
내가 이런 일을 정말 하고 싶을까? 25년 후의 내 커리어가 저런 모습이라면? 물론 25년 후에 내가 건축을 계속한다고 해도 분명 다른 모습이겠지만 보수적인 건축업계에서 그렇게 큰 변화는 불어올 것 같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25년이나 건축을 정말 하고 싶을까?’나 ‘롤 모델을 찾을 수 없다’는 다 겉도는 핑계였다. 정확하게 ‘건축 실무는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다’가 맞는 말이었다.
꼰꼰 건축을 겪으면서 계속 나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롤 모델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현타가 왔던 것도, 그저 내가 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다. 2년 차 사원으로서 새벽 늦게까지 본부장, 소장들과 일하면서 느낀 게 바로 내가 가리고 싶었지만 가릴 수 없었던 ‘건축은 내가 바라던 길이 아니다’였다.
현상 마지막 날도 비교적 가볍게 새벽 3시까지만 일하고 다음 날 아침에 보고서를 프린트해 제본까지 마친 후 제출했다. 모두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평이 좋지 않던 ‘하남 재활병원 현상’은 신기하게 다른 경쟁사를 뚫고 당선이 되었다. 다들 의아해했다. 디자인에 힘도 없는 제안이 발주처에 먹히다니.
자세히 보면 잘 설계되고 감각적으로 디자인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밤 한번 새지 않고 당선될 수 있었다. 마치 현상마다 밤을 새우고 미친 듯이 달려왔던 게 꼭 정답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열심히 디자인을 잘하고 건물의 계획을 잘 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윗선의 물밑 작업이나 뒷돈이 더 중요했다. 현상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사실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현상 당선 후 디자인이 모조리 바뀔 때는 더더욱. 그래서 ‘하남 재활병원 현상’은 재밌는 현상이 아니었다. 무엇을 특별히 이룬 것 없는 현상이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현상 프로젝트를 마치고 다시 ‘제천 아파트 신축공사’ 프로젝트로 돌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