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내가 좋다.
해가 진 시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일기장 앱을 켰다. 한 줄을 적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길러온 습관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문장들을 그때마다 기록하는 것. 그 문장들은 화면 밑으로 내려가 정처 없이 기억 밖으로 흘러가기도 하고, 스크롤을 내려 다시 꺼내보기도 한다. 하지만 귀로에서 쓴 이 한 줄은 특별했다. 이 문장만큼 나를 미소 짓게 만드는 문장이 근래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서 피어난 이 문장. 이 문장이 심어져 피어 나오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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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12월이 찾아왔다. 날씨가 쌀쌀해졌고 해는 여름에 비해 많이 기울었다. 빛의 색은 따뜻해졌고 공기는 바삭해졌다. 온도는 내려갔지만 이른 아침 이불속은 포근해졌다.
매해 이런 계절이 올 때 즈음이면 인스타그램에 올해의 책, 올해의 공간, 올해의 드라마 등 한 해를 되돌아보는 포스팅이 유행처럼 올라온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나의 ‘올해’를 공유한 적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올해는 어땠는지 염탐하는 것을 즐긴다. 어김없이 찾아본 한 독립책방 사장님의 ‘올 해의 OOO’에는 이런 카테고리가 있었다.
올해의 사건.
올해에 일어났던 가장 좋은 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12월과 연말이라는 맥락에서 올바르겠지만, 나는 불행했던 지난 시간들이 먼저 떠올랐다. 아무래도 인간은 좋았던 것보다 싫었던 것을 트라우마처럼 기억하는 동물이 맞나 보다.
불행했던 지난 시간은 4월부터였다. 주말 출근과 끝없는 야근. 5월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쳐버린 책임감과 스트레스로 공황장애 진단, 그리고 정신과 약 처방. 6월에는 그것도 부족했는지 건강을 위한 휴직. 하지만 회복되지 않아 결국 퇴사. 7월에는 무엇이라도 해보려 커피 프랜차이즈에 입사했다 일주일 만에 퇴사. 8월에는 현실과 꿈의 타협점을 찾기 위해 카페 아르바이트 시작. 9월에 또 퇴사. 10월에는 6년을 산 원룸에서 퇴실하라는 집주인의 요청. 11월에는 마땅한 집을 찾지 못해 결국 서울을 떠나 본가로 돌아온 일.
되돌아보니 올해는 마음 쉴 틈 없이 터지는 사건 사고로 많이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죽이지 않고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용기를 냈기 때문이었다.
공황발작이 나타났을 때 주저하지 않고 정신과로 향한 것. 그리고 건강을 위해 휴직한 것. 더 이상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퇴사한 것. 그리고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며 무너질 때마다 다시 시도하겠다고 마음먹은 것. 힘들 때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나의 상태를 스스로 인정하고 눈물로 털어놓은 것.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한숨 자고 생각해야지 마음먹은 것.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깊은 동굴로, 아득한 어둠의 심해로, 아무도 없는 깜깜한 숲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불행의 사이사이, 용기는 기쁨으로 살아갈 일들을 만들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삶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 소설 쓰기 클래스를 들은 것, 새로운 책을 출간한 것, 글쓰기를 꾸준히 한 것, 나처럼 힘든 상황에 있는 친구를 만난 것, 아침에 일어나 산책이나 운동을 한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그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서울을 떠난 것까지.
불행과 눈물, 좌절과 절망, 행운과 행복, 성취와 웃음 모두를 하나로 묶는 단어가 있다면 올해의 나에게는 ‘용기’뿐이다.
그 여정에는 자책과 불신도 무수했다. 때로는 시간에 기대어 흘려보내야 했었던 것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남은 건 용기뿐이라 생각하며 지새운 밤들로 버텼다. 그 밤들이 쌓여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밤들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곳까지 다시 날 데려다주었다.
다시 돌아가 이야기하자면, 독립책방 사장님이 올해의 사건으로 무엇을 적었는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염탐을 하다 사색에 빠져 잠시 한 해를 둘러봤을 때 올해의 사건은 불행했던 일들이 아니었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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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 책의 제목을 "무너진 나를 재건축합니다"라고 지었다. 사실 그때는 무너진 건 알았지만 나를 어떻게 재건축할지는 몰랐다. 어떻게든 지어지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무너진 건물을 철거하고, 다시 기초를 공사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고 고된 일이었다. 지난 8개월이 그러했다. 이제 기초 공사가 마무리되었다고 믿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요즘 내가 좋다. 무너지고 넘어졌던 순간에 용기를 내었던 내가. 크고 작은 갈림길에서 나를 위한 선택을 했던 내가. 잠시일 뿐이라도 이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겠다고 믿는 내가. 그런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