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출(家出)

by 재민

가끔은 그런 날이 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침대 밖으로 나오기 싫은 날. 운동을 가려고 현관 앞까지 갔다 신발을 못 신어 다시 침대로 돌아온 날. 평소 아침은 챙겨 먹지 않는데 혹시 몰라 식빵을 토스트해 버터와 딸기잼을 발라 우걱우걱 먹는 날. 그것도 부족했는지 운동을 안 갔으면 글이라도 써야지 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가 유튜브만 계속 보는 날. 유튜브도 금세 실증이나 그럴 바에는 생산적으로 집청소나 해야지 하고 청소기와 걸레질을 글쓰기 대신 하는 날. 소중한 마음을 잃어버린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 엄마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엄마는 전날 끓여 놓은 콩나물국과 각종 나물과 장아찌 반찬을 꺼내셨다. 평범하지만 일상적인 한 상이 었다. 밥을 먹으면서 나는 엄마가 외출한 동안 집안 구석구석 청소기도 돌리고 걸레질까지 했다고 말했다. 마치 초등학생 자식이 칭찬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생색을 내보였다. 사실 생색으로 감추려 했던 것은 한 글자도 쓰지 못한 그날의 내 모습이었다. 작가로 살아본다 해놓고 의지박약 하게 글을 쓰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수치심이 슬금슬금 올라와 넘칠 즈음, 결국 엄마께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본가로 이사 온 후 활기 넘치고 편안해 보였던 아들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엄마는 가벼운 말투로 답하셨다.


“아들. 그런 날도 있는 거야. 그러지 말고 기분전환이나 하자”


점심을 먹고 우리는 나갈 채비를 했다. 엄마는 오늘 날씨가 추우니 목도리와 장갑을 끼라고 하셨다. 나는 목도리를 두르며 1층 공동현관으로 내려갔다. 현관문을 활짝 여는 순간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어오듯 들어왔다. 하루 종일 보일러가 돌아가는 따뜻한 집에 있던 내게, 그날 처음 맞아보는 바깥바람은 상쾌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집이든 사람이든 환기가 중요하다.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탔다. 평일 오후의 한산한 버스는 우리에게 빈 좌석을 제공했다. 승객이 적은 만큼 버스 안도 조용했다. 엄마와 떠들며 갈 수 없었다. 괜히 라디오나 노래도 틀지 않으시는 버스 기사님을 탓했다. 나는 엄마와의 수다 대신 핸드폰 켜 메모장에 떠오르는 문장을 적었다.


소중한 마음. 지켜내야 하는 마음.


누구에게나 지키고 싶은 소중한 마음이 있을 터이다. 나에게 그 마음은 ‘글 쓰고 싶은 마음’이다. 소중하고 지켜주고 싶은 그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음의 가출이었다. 버스 안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집 밖을 나간 그 마음을 어떻게 되돌아오게 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수소문해 억지로라도 그런 마음을 돌아오게 만들어야 할지.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마치 가출한 자식이 있는 것처럼 생각이 깊어졌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엄마는 ‘STOP’이라고 쓰여있는 붉은색 하차 벨을 누르셨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한 쇼핑몰이었다. 쇼핑몰 안은 화려한 물건들과 그것들을 구경하는 활기찬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겨울 코트와 레고로 만들어진 크리스마스트리를 구경하고, 카페에서 커피와 라즈베리 잼이 올라간 스콘을 먹었다. 해가 진 후에는 푸드코트에서 수제 버거를 야무지게 먹고, 지하에 있는 창고형 마트에서 시장도 봤다. 온갖 물건이 반짝반짝 빛나 사람들을 유혹하는, 별들의 전쟁이 펼쳐지는 OO필드. 그곳에서 나는 눈과 마음을 별 같이 빛나는 것들에게 내어준 채 소중한 마음에 대한 고민은 잠시 잊어버렸다.



긴 시간을 쇼핑몰에 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피곤했다. 뜨거운 물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푹신한 침대 위 까슬까슬한 이불에 누워 짧은 소설을 하나 읽으니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가출했던 소중한 마음이 돌아왔다! 내가 한 것은 찬 바람을 쐬고, 빛나는 것들을 구경하고, 엄마와 카페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는 아주 소비적인 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러고 나니 글 쓰고 싶은 마음이 돌아온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 마음을 너무 지키고 싶어서, 손아귀에 꽉 쥐고 있어서 그 마음이 가출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힘을 빼야 멀리 보낼 수 있다는 골프를 좋아하는 한 친구의 역설적인 말이 떠올랐다.


물론 친구의 골프 조언 외에도 쓰고 싶은 문장들이 마구 머릿속에 떠올랐다. 곧장 책을 덮고 핸드폰 켜 메모장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두서없이 적었다. 어디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메모장에 잡아두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쓰고 싶은 마음을 위해 쓸 수 있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다. 소중한 마음이,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가출해 버리는 날. 그럴 땐 잠시 그 마음에게 밖에서 놀다 올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겠다. 그러면 가출한 소중한 마음은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까. 돌아오면 소중한 마음과 함께 하는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겠구나 하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