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에게는 세 명의 양육자가 있다. 할머니, 엄마, 아빠가 그들이다. 수년간 시행착오를 겪은 탓에 시스템은 유기적으로 잘 돌아가는 편이다. 할머니 - 이하 어머니 -의 주임무는 제이를 먹이는 것이다. 덕분에 제이는 잘 먹고살고 있다. 그 먹기 어렵다는 생선구이를, 그것도 종류별로 돌아가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먹고 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다. 파스타, 피자 등 제이가 원하는 것이면 배워서라도 해 주신다. 옆에서 지켜보면 마치 《심야식당》- 일본 드라마 -에라도 온 듯, 말하는 대로 음식이 나온다. 덕분에 버릇은 좀 나빠졌지만 잘 자라고 있다. 이젠 한 살 많은 조카보다 키가 더 크다.
엄마 - 이하 아내 -는 제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 상대이다. 아내가 올 시간에 현관문 비번 누르는 소리가 들리면 희색이 만면하여 뛰어나갈 정도다 - 보통의 아이에게는 당연한 일로 보이겠지만 제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친구들에게는 특별한 일이다 -. 아내는 제이가 재미있으면서도 길게 놀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다. 교육적이기도 하다. 아내가 진료를 줄이고 저녁시간을 제이에게 할애한 이후 제이의 상호작용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아빠 - 이하 나 -는 대외업무를 맡고 있다. 여섯 살짜리가 무슨 대외업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다. 이는 제이가 평범한 아이들보다 빡빡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선 일주일에 세 번씩 센터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 그나마 병원 언어치료를 못하게 돼서 동선이 간결해진 편이다. 예전에는 하루에 두 군데를 들러야 했다. 센터 수업이 끝나면 어린이집에 데려다줘야 한다. 센터 선생님들이나 어린이집 원장님도 내가 만나야 한다. 그리고 주요 내용을 정리해서 '제이 육아방'이라는 단톡방에 전달한다. 자연스레 내가 센터와 어린이집의 소통창구가 되었다. 행정처리도 도맡아 한다. 제출서류를 챙기고 - 생각보다 자주 있다 - 매월 돌아오는 결제도 해야 한다 - 생각보다 오류가 많아 잘 따져 봐야 한다 -. 어쩌다 보니 극성 아빠가 되어 버렸다 - 정말 내 스타일이 아니다 -.
우리 육아 공동체는 역할만 잘 정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 배분도 꽤 효율적이다. 어머니는 평일 아침과 저녁을 책임지신다. 그리고 토요일은 거의 하루 종일 제이를 돌보신다. 아내는 야간 진료가 있는 이틀을 제외하고는 제이가 하원해서 잘 때까지 열심히 놀아준다. 나는 아내 - 혹은 어머니 -가 목욕을 시키면 제이를 재운다. 자는 시간이 비슷한 데다가 제이가 나랑 있을 때 잘 자기 때문에 이 임무는 내가 맡게 되었다. 일요일 - 그리고 휴일 -은 제이와 놀러 간다. 워터파크, 키즈파크, 놀이공원, 기차여행 등 제이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최대한 같이 하려고 한다. 일주일 간 고생한 꼬맹이를 위한 일종의 보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조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양육자가 여러 명이라는 것이 제이에게는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놀이치료 선생님이 수년 째 걱정하시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지시를 이해하고 반응하는 것이 제이에게는 벅찰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집단 육아는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내와 내가 동업을 시작할 무렵 제이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제이 육아방' 멤버들의 스타일이 무척 다르다는 점이다. 내가 어릴 때에는 그렇게 엄하시던 어머니는 제이 앞에서는 그렇게 인자하실 수 없다. 제이가 원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신다. 아내는 비교적 균형 잡혀 있다. 일관적으로 상냥한 태도 - 나에게도 그렇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를 유지하면서도 교육이 필요할 때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제이를 대한다. 나는 여느 아빠처럼 온도 차가 큰 편이다. 좋을 때는 좋지만 무언가 마음에 안 들 때면 짜증을 내게 된다. 이러니 제이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
제이 입장에서 보면 난감한 일이다. 아침에는 밥을 먹여 주더니 저녁에는 갑자기 스스로 먹으라고 하고, 심지어 아빠는 빨리 안 먹으면 밥상을 치워버린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식사 문제만이 아니다. 동영상 시청, 옷 입기, 배변 실수에 대한 반응 등 많은 부분에서 세 명의 양육자의 태도는 다르다. 온도차도 있다. 때문에 우리 육아 공동체는 일종의 합의를 봐야 한다. 하지만 이게 만만치 않다. 민감한 문제이기에 서로 조심스러워한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육아 멤버들이 제이를 돌보는 시간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집단 육아를 할 경우 압도적인 시간을 차지하는 주양육자가 있는 것이 아이의 혼란을 덜어줄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대한민국의 국민답게 육아 시간을 고르게 분배하였다. 이는 육아 공동체 멤버들에게는 무척 공평한 처사이지만 제이에게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원인일 뿐이다.
몇 년 새 제이가 부쩍 크면서 공동 육아에 대한 걱정은 조금 누그러졌다. 제이는 세 명의 양육자 각자의 스타일에 적응한 듯하다. 심지어 이용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시간이 아닐 때면 마음이 약한 할머니에게 지속적으로 어필한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 몸으로 놀고 싶을 때, 무언가를 먹고 싶을 때 제이가 찾는 사람은 각각 따로 있다. 평소의 제이를 생각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표현한다는 것은 무척 대견한 일이다. 물론 한 명의 양육자가 제이를 계속 돌볼 수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지금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공동 육아가 제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부분도 있었을 거라는 기대마저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완벽할 필요도 없다. 때론 완벽함이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