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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큐 Mar 12. 2024

일본여행

제이는 여섯 살이 되기 전 일본에 세 번이나 가봤다. 심지어 마지막은 비즈니스 석 - 동행하신 할머니와 쌓여가는 마일리지 덕에 호사를 누렸다 -을 타고 말이다. 서른 살에, 그것도 비행기값을 아끼려고 환승하며 일본 공기를 처음 마셔 본 나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코로나 이전 두 번의 유후인 여행은 사실 우리 부부를 위한 것이었다. 당시 아내는 산후우울증이 심했다. 출산을 하고 두 달이 못 돼서 일터에 복귀를 한 데다가 처음 하는 사업의 부담감까지 더해져 옆에서 지켜보는 나까지 힘들 정도였다. 이때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여행- 거의 요양에 가까웠다 -이었고, 그렇게 가게 된 곳이 유후인이었다.



          첫 여행은 한의원을 개원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추석 연휴에 며칠을 붙여 갔던 걸로 기억한다. 용기가 필요한 여행이었다. 직원은 달랑 두 명인 데다가 당연히 부원장도 없었기에 한의원 문을 닫고 가야 했다. 게다가 숙소로 선택한 료칸은 무척 비쌌다. 하지만 아내가 아직 회복을 못 한 데다가 제이는 어렸기 - 태어난 지 8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 - 때문에 별 다른 대안이 없어 보였다.



          토로로의 고향 유후인으로 가는 길은 - 재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 물리적으로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버스로 갈아타 몇 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다행인 점은 가장 걱정했던 제이가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제이는 생각보다 참을성이 강했다. 비행기에서는 비좁은 아기 바구니에서도 방긋방긋 웃으며 여행을 즐겼고 몇 시간씩 달려가야 하는 지루한 버스 안에서도 의젓하게 있어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별 탈 없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렵게 도착한 유후인은 좋았다. 당장이라도 토토로가 튀어나와 인사를 할 것만 같은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얼마나 좋았는지 우리는 그다음 해에도 이곳을 찾게 된다. 하지만 제이와의 첫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따로 있다. 료칸에서 일하시는 스태프 분이 하신 말씀이다. 나이가 좀 있으신 여자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이 보기에도 제이가 좀 달라 보였던 것 같다. 그분이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 법한 친근한 음성으로 느릿느릿 말씀하셨다. "느린 아이가 영리합니다"



          무리가 있더라도 매년 일본에 와서 충전의 시간을 가지자는 우리 부부의 다짐은 세 번만에 깨지게 된다. 코로나로 여행을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는 4년을 기다려서 그 약속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제이를 돌보느라 고생하신 어머니와 함께였다. 그래서 보다 이동이 편한 도쿄로 가게 되었다. 항공도 비즈니스 좌석으로 잡았고 - 영업을 하면 카드 마일리지가 많이 쌓인다 - 숙소도 어머니 취향에 맞는 세련된 료칸으로 정했다. 하코네라는 도쿄 주변의 온천 마을에 있는 숙소였다. 어머니는 일본에 대한 로망이 있으셨다. 바로 기차여행이었다. 아내는 어떻게 찾았는지 '로망스카'라는 시야가 확 트인 기차의 맨 앞 좌석을 예약했다. 그리고 하코네 등산열차 - 기차가 진짜 산으로 올라간다 -라는 것도 미리 알아봤다. 료칸이 산 중턱에 있는 탓에 기차를 한 번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다.



          완벽해 보였던 계획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로망스카는 배차 간격이 띄엄띄엄했는데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기가 어려웠다. 도쿄의 교통체증도 서울 못지않기에 까딱하면 기차를 놓칠 수 있었다. 택시를 알아봤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고 제시간에 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아내는 한 번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로망스카를 포기하고 - 환불도 되지 않는다 - 다른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로망스카를 놓치면 료칸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 늦는 데다가 돌려받지 못하는 티켓값도 아까웠다. 더군다나 료칸의 꽃인 저녁을 제대로 못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부탁에 대한 특이한 지론을 가지고 있다. '부탁을 들어준 사람은 도와줘서 좋고 부탁을 한 사람은 어려움을 해결해서 좋다. 고로 부탁은 망설일 필요가 없다.' 아내는 이 같은 나의 뻔뻔함을 신기해하면서도 부러워한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몇 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대학교 동기 훈이- 내가 사수를 해서 입학한 탓에 나보다 세 살 동생이다 -에게 연락을 했다. 훈이는 나의 뻔뻔함이 머쓱해질 정도의 제안을 했다. 하루 휴가를 내서 우리 가족을 기차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 최선을 다하겠지만 - 만약 기차를 놓치면 하코네에 있는 료칸에 데려다주겠다는 것 아닌가. 제시간에 기차역에 도착할 수 있는 교통편 정도를 물을 요량으로 연락을 했는데 데려다주겠다니.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고마움을 넘어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그 친구 덕분에 가족들은 무사히 로망스카를 탈 수 있었고 나는 여행의 마지막 날 도쿄에서 저녁을 사겠다는 말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훈이는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일본에 살고 있었다. 겸손한 성품에 가려져 있지만 두 개나 되는 - 우리나라와 미국 - 회계사 자격증에 번듯한 직장에서 꽤 많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도쿄 변두리에 작은 주택도 하나 마련했다고 했다. 하지만 훈이에게도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자폐였다. 몇 년 전 통화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 그땐 자폐라는 단어조차 생소해서 재차 되묻기도 했다 -. 훈이는 허름한 일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훈이의 아들과 나의 딸인 제이의 이야기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일본의 특수교육이 우리나라와는 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훈이의 경험에 한정한다면 -.



          훈이의 아들은 세 살 때 자폐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아이가 조금 다른 것 같아 병원에 갔는데 몇 번 진료를 보고 바로 진단을 했다고 한다. - 아이들의 상황은 좀 다르겠지만 - 3년째 병원에 다니면서도 확실한 진단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제이의 상황과는 무척 달라 보였다. 더 큰 차이는 교육이었다. 훈이는 아들을 초등학교에 보내기 전에는 특수교육기관에 보낸 적이 없다고 했다. 수년 째 사설 특수교육기관에 다니고 있는 제이와는 분명 달랐다. 훈이는 아들이 자폐라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특수교육을 받을 필요는 없을 거 같다고 했다. 어차피 도달할 지점이 비슷하기에 빠르게 가는 것에 그 정도의 노력과 돈을 투자할 필요는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고는 아들이 특수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거기서는 우등생이에요."



          헷갈렸다. 훈이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이를 고생시키며 매년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들이고 있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일본처럼 진단을 빨리 내려 부모의 혼란을 줄여주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나라처럼 넓은 스펙트럼에서 아이를 꾸준히 지켜보며 부모에게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은 없는 듯 보인다. 어쩌면 훈이는 운이 좋아서 아무런 교육 없이도 아들이 학교에 잘 적응한 것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 통화에서 훈이가 한 말이 기억난다. 아들이 창문을 넘어서 집에서 탈출한 후 경찰까지 출동해서 찾았다는 이야기 끝에 한 말인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훈이는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자기만 행복하면 되죠" 이게 정답인 듯싶다. 물론 행복으로 가는 길은 각자 다를 수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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