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일상 16화

20250815

그게 내가 될 줄이야..

by 밤호랑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뿐만 아니라 건조기도 야무지게 돌아갔다. 빨랫감이 많아서 특별히 좀 더 고온으로 설정해서. 내가 정말 아끼는 녀석이 안 보이길래, 문득 건조기가 계속 돌아가며 둔탁한 소리를 내던 것이 떠올랐고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건조기 문을 열자마자 두 콩나물이 나란히 삐죽하고 나를 맞았고, 이어폰 본체는 찜질방 조약돌 마냥 아주 따끈따끈하게 달궈져 있었다.

오랜 시간 내 귀를 즐겁게 해 주고 위로해 주던 녀석과 작별할 생각에 금방 기분이 다운됐다. 가격을 떠나서 애착 인형 같은 아이템이 누구나 있지 않은가. 당황한 나는 당근어플을 켜고 갤럭시버즈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떠난 자리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는 듯이. 미친 듯이 찾다가 문득 이 녀석을 작동시켜 보았다.

작동된다... 미약하나마 살아있다고 알리는 빨간 불이 보이는가..

인터넷에서 '세탁기가 돌아갔는데 작동이 되네요..' 하는 글들을 보며 참 다들 정신머리 없고 부주의하구나 라며 헛웃음 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쿠팡 배송을 하다 보면, 이른 새벽시간임에도 입주민들과 마주친다. 대게는 담배 생각이 나는 아저씨, 동네 산책 및 운동을 나가시는 어르신 그리고 출근길을 서두르는 내 나이또래의 사람들이다.

배송할 짐들이 많은데 사람들이 타게 되면 난 가까운 층을 누르고 내린다. 어차피 여러 층을 누르고 배송을 한 번에 마치는 것이 입주민들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롭다.(참고로 새벽배송 7시 리밋을 맞추기 위해서, 기사들은 정말로 분주하고, 물량이 너무 많아서 차량에 적재하고 구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어떠한 예외사항이 없다고 했다. 거기에서 오는 페널티는 온전히 자신의 몫임은 덤이고) 아쉬울 때는 택배물이 두어 개 즈음 남았고, 하필 배송시간에 쫓길 때다. 짐을 배송하고 사진 찍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쏙 돌아오면 되는데, 그 잠시의 시간도 다른 이에게는 짜증과 불필요한 시간 지연처럼 느껴질 일이다. 사실 내가 그랬으니까.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도중에 엘베를 타셨는데, 엉거주춤하고 서있는 나를 보고는 실소를 터뜨리셨다. 그리고는 흔쾌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시겠노라 했다. 내 체감상 그렇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 너그러운 편이고,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온화한 표정을 볼 수 있다,

이 바쁜 사회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연세 많은 노인들 혹은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없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언제 어디서든 여유는 찾을 수 있다. 다만 나의 마음밭이, 당신의 마음밭이 모종의 이유들로 오염되어 있고, 너무 아프고, 힘겨워하는 시간들을 견디고 있기에 그 여유를 찾을 수 없을 뿐. 아주 어릴 적 즐거웠던 경험이 단 한순간이라도 기억난다면, 그것에 잠시 집중해 보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여전히 시간에 쫓기고 있는가?


그 찰나의 순간들에 난 그 어르신의 행복과 건강을 기도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1층 로비에서 내리는 그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드렸다.

"복 받으세요..!"




싸고 좋은 물건을 구하는, 낚시를 하는 것 같은 재미에 당근을 자주 사용한다. 그중에 부동산 탭이 있는데, 우리 지역에 나와 있는 많은 매물들을 볼 수 있다. 거기엔 오피스텔 월세입자를 구하는 글뿐만 아니라, 가게의 새로운 주인을 찾는 글들이 정말 많다. 대부분 부동산 업자들이 올린 글로, 전 가게 주인이 장사를 접고 새로운 임차인을 구하게 되는 경우나, 혹은 가게 사장이 직접 자신의 가게를 인수할 사람을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 아픈 것은 내가 자주 가던 가게, 혹은 동네 마실 나가는 길에 자주 보던 가게, 미처 내가 가보지 못했지만 한번 들리고 싶었던 곳등... 사람 냄새나는 점포들이 모조리 매물로 올라와있다는 것이다.


매물 중 어떤 가게의 상호는 '너는 해낼 수 있어'라는 의미의 영문장이다. 그 조그마한 가게를 오픈했을 때의 마음이 어땠을까. 설렘과 희망에 뿌듯해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정든 그 점포를 내놓을 때의 마음은 또 어떨까.

무조건 높은 유동인구, 높은 수익, 꾸준한 매출을 자랑하는 글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잘되는 가게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주 장사가 안 되는 가게도 아닙니다."

라는 솔직한 글들도 있다.

모르겠다. 이미 내가 살던 동네 아파트 매물이 한 단지에서만 백건이 올라와있고, 거래는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도 점점 단독가구 혹은 부부 중심의 가족형태가 되면서 작고 단단하고 예쁜 신축아파트를 원한다. 아무도 같은 값에 관리비만 많이 나오는 구축을 선호하지 않는다. 벌써 나부터도 그런 걸. 이런식으로 상권이 허물어지는 동네인데, 월세 150-200이 기본으로 나가는 포화시장의 자영업 생태계에 뛰어들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회사에서 거래하는 택시회사가 있는데, 기사님들의 말투와 표정에서 경제지표를 읽는다. 그분들이 '손님들이 정말 없어요'라고 하면 경제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고, '요새는 좀 손님들이 있네요, 생기가 도네요' 하면 소비 심리지수가 회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도 알고 있지 않은가, 무역흑자와 대기업의 임금인상과 실적발표는 안타깝게도 나와 대다수의 주머니 사정과는 동 떨어져 있다는 것.

엎질러진 물이라고들 하고, 돌이키기 힘들 거라고 하지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힘겨운 나날들을 보냈기 때문에 혹은 여전히 견뎌내느라 삶이 버거운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같이 일어섰으면 좋겠다. 이제는 막연한 근거 없는 긍정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 힘을 기르는 중이다. 모두를 위해서-


아, 참고로 저 괴물 같은 내 애착 이어폰 링크를 걸고 가겠다. 물과 세제와 고온과 외부 충격을 이겨낸 친구다. 역전의 용사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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