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에 대하여

판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글을 쓰는가

by 김의진

2025.4. 4.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 사건을 선고했다. 정치적 평가,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한 가치판단은 뒤로 하더라도 판결문 원문 그 자체만으로도 이슈가 되었다. 국어 교사들까지 정말 잘 쓴 글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뉴스로 접한 영상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되는 소식이었지만, 판결문 원문 그 자체를 두 눈으로 읽어보고 싶어 다운로드 받아서 천천히 살펴봤다. 법원의 판결문은 용어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글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너무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 놀라웠다.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 책은 바로 그 글을 썼던 헌법재판소장, 문형배 판사가 20년 넘게 인터넷 블로그에 썼던 여러가지 형식의 글을 모은 책이다. 기대했던대로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로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일기와 같은 느낌의 글, 에세이 모음이다. 그가 그 당시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옮겨둔 기록 중에 선별한 글이다. 중반부는 책을 읽고 쓴 글, 독후감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책의 곳곳에 나온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독후감으로 실은 글은 주로 서양 고전이었다. 내가 아직도 재미없다는 편견에 읽지 않고 있는 바로 그 책들 말이다. 내가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대신 읽어주고 내용과 느낌을 정리해주어 고맙기도 했고, 그 지루함을 이겨내며 재미를 찾아가는 그의 독서 인내력이 부럽기도 했다. 후반부는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된 글이다. 재판에 대한 생각과 고민, 인사 때마다 써 두었던 인사말 등이다. 담백한 취임사와 이임사가 특히 눈에 확 들어왔다.




세월은 흘러 이제 마흔여섯 살이 되고 법관 경력도 20년이 넘었다. 법도 조금 알게 되었고, 남의 말도 조금 알아듣게 되었으며, 세상 물정도 조금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니었다. 대가를 치렀다. 열정이 예전 같지가 않고 도덕 수준도 낮아졌다. 야근도 별로 하지 않는다. 사건을 물고 늘어지지도 않고 모르는 사건이 있어도 남에게 묻지도 아니한다. 30대에 형사 단독 판사를 할 때 어느 지원장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30대가 되면 단독 판사로 판결할 수 있다” “부처님도 득도한 때가 30대였고, 예수님도 돌아가실 때가 서른세 살이었다.” 그분의 말씀을 지금에 와서 풀어보자면 ‘세월의 부피가 아니라 세월의 무게가 중요하다. 그러니 나이의 적고 많음에 얽매이지 말고 세월의 무게를 체화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경험하여라’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상 물정에 밝으면서도 열정과 도덕성을 그대로 간직하며 나이를 먹을 수는 없을까? 설날을 앞두고 한 살 더 먹는 것이 즐겁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몇 자 적는다.


나는 작가가 이 글을 썼던 딱 그 시기, 그 나이에 있다. 무언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일을 할 때 조금 수월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다만, 열정이 예전같지 않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묻지 않는다. 그의 말처럼 세상 물정에 밝으면서도 열정과 도덕성을 간직하며 살고 싶다.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교육청에서 장학사로 근무하면서 처리한 수 많은 민원 중에는 '악함'이 의도이자 목적인 경우도 있지만, 말 그대로 정말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내용도 생각보다 꽤 있었다. 자신의 지식과 지위, 경제적 능력 등을 바탕으로 법령과 제도의 맹점을 파고드는 기술자들도 있었지만, 시도교육청이 지역을 구분하여 학교를 관할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학부모들도 존재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까운 사례를 접하기도 했다. 착한 사람일수록 더욱 법을 공부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너무나도 공감된다.




판사란 타인의 인생에, 특히 극적인 순간에 관여하는 사람이다. 분쟁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인생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없다면 자칫 그들 인생에 커다란 짐을 지우는 오판을 할지도 모른다.


판사라는 단어를 교사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문장이다. 교사의 말 한마디가 미래에 우리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뜻하지 않게 태어나는 괴물의 시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생에 대한 이해와 풍부한 교육 경험이 그래서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미성숙한 학생을 교육한다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글쓰기의 이유는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얼마쯤은 우쭐대고 싶은 마음도, 얼마쯤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록하고 싶기 때문이다. 10년 지나서 내가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나 없나를 따져볼 때 내가 썼던 글이 잣대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그는 인터넷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이유를 위와 같이 밝혔다. 거창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지금 브런치에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비슷하다. 몇 년 동안 꾸준히 글을 쓰다보니, 말 그대로 기록을 남겨둔다는 행위 그 자체에도 큰 의미가 부여된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펼쳐지고, 나는 또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록을 이어가다보면 과거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계속 글을 쓰고 싶은 이유, 그것도 열린 공간에 기록하고 싶은 이유다.




업무에 정통한 것이 최고의 친절이다.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고 일주일 이내에 형성된다. 꾸준한 독서가 필요하다.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 롤 모델을 찾는다.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한다.


후배 공직자들에게 당부하는 그의 말 속에 진심이 느껴진다. 내가 선배들에게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가 후배들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지만, 억지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 억지로 좋은 첫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좋은 사람 그 자체가 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법의 문체는 간단해야 한다. 법의 문체는 평이해야 한다. 법은 또한 너무 정묘해서는 아니 된다. 충분한 이유 없이 법을 변경해서는 아니 된다. 법에서 예외나 제한이 필요하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법에는 청정함이 필요하다.


판사로서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판결문을 써내려갔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공무원은 항상 법적 안정성, 예측가능한 안정적인 행정 등의 틀 안에서 직무를 수행한다. 조급은 답답하더라도 원칙이 무너지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교사가 하는 말 역시 간결하고 담백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학생에게 더 다가갈 수 있다. 교감이 교사에게 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구성원 여러분, 우리가 만났으니 언젠가는 헤어지겠지요. 그때까지, 이 법원을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하고 싶은 직장, 밤에 잠자리에 들면 ‘오늘 하루 참 보람 있었다’고 느끼는 직장으로 만드는 데 정성을 다하겠습니다.저의 위치는 여러분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니고 여러분 사이입니다. 여러분을 연결하고 싶습니다. 저를 소통의 도구로 사용해주십시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그가 했던 취임사, 이임사, 인사말 등이 나온다. 이 책을 읽으면서 형성되는 문형배라는 글쓴이에 대한 종합적인 이미지 그대로다. 화려함은 없지만 담백하고 은은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분명히 전달한다. 본질을 숨기고 글로써 자신을 포장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남을 속이는데 잠시 성공했다고 해도 오랜 시간동안 들키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 글로써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을 더 자주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라도 그렇게 살다보면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리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