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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22. 2024

비참한 거짓말들

제3장. 자살 유가족으로 세상에 나아가며(2)

떠나간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이들에게

초안,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


오빠. 오빠와 함께하며 질문을 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 솔직히 말하면 물어볼 게 별로 없었고,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러나, 질문을 할 상대가 없어진 지금, 지금에서야 닿지 못할 질문들이 많아졌어. 오빠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오빠라면 어땠을까. 언제나 현명한 길을 택하던 오빠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늘어만 가는 거짓말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며 ‘수험생활’에서 벗어난 뒤, 나는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오빠의 부고 이후 언제나 날 걱정하던 내 소중한 두 명의 친구 품으로, 갑자기 연락을 끊어 내 소식을 궁금해하던 친한 지인들 곁으로, 4학년 대학생의 학교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첫걸음을 내딛는 사회생활로. 다시 돌아간 세상과 새롭게 입성한 세상에서는 내게 숱한 질문을 쏟아냈다. 안부, 개인 신상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부터, 가치관이나 선택의 이유 같은 깊숙한 질문까지. 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도 질문을 해댔다.

 오빠의 죽음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했던 가족들과, 친구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두 명의 가족뿐이었다. 그들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내가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려주었기에. 그들은 본인들의 진심을 먼저 꺼내어 보여줬다. 그들의 진심에 나 또한 진실한 마음을 나누었다. 그들과 나누는 건 진실한 대화였다.

 반면, 가족 이외의 사람들은 숱한 질문을 쏟아냈다. 가벼운 질문부터 무거운 질문까지. 질문의 무게는 다양했으나,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언제나 무거웠다. 그들이 던지는 거의 대부분의 질문 속에는 오빠가 있었기에.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간단하고 흔한 질문이었지만, 내게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무거운 질문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기본적인 질문도, 내게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무겁디 무거운 질문들이었다.  

 그 다양한 무게의 질문 속,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길 택했다. 굳이 오빠의 죽음을 꺼내보이고싶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아직, 오빠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오빠의 죽음을 함부로 입에 올리기 싫었다. 거짓 투성이의 답변을 할 때마다 언제나 오빠한테 미안했다.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건 오빠의 사인이 자살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빠를 떳떳하게 내보이지 못하는 게 언제나 미안했다.

 내게 오빠는 언제나 자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오빠에 대해서는 떳떳하지 못할 게 없었다. 우리 오빠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대학교에 다녔고, 이런 직장을 가졌고, 이런 것들을 이뤄낸 사람이에요. 내게 오빠는 언제나 꺼내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빠가 자살로 세상을 떠난 뒤로, 나는 오빠를 떳떳하게 내보이지 못했다. 그럴싸한 거짓말로 오빠를 포장했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그런 내 답변에 죄책감이 크지 않지만, 그때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거짓말과, 무뎌지지 않는 죄책감이었다. 오빠, 오빠를 떳떳하게 여기지 못해서 미안해. 오빠 내가 미안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갑 속 오빠에게 언제나 씁쓸한 사과를 건넸다.



다시 돌아간 일상에서

 시험이 끝난 뒤,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잔뜩 만났다. 그들의 필수 질문은 ‘잠수의 이유’였다. 어쩜 그렇게 연락 한 번 안 하냐고, 왜 그렇게 사람을 하나도 안 만났냐고, 잘 지냈냐고. 처음 시험을 준비할 땐 주변 사람들과도 가끔 보고 연락도 하고 지냈다. 오빠의 죽음 이후에는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기에, 그들에게는 해결되지 못한 궁금증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오빠의 장례식부터 공무원 시험날까지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처절하게 무너지고 일어나며 붙잡고 있던 시간들. 그 모든 시간엔 오빠가 있었기에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눈알만 굴리고 있는 나와, 그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정적은 대답을 강요하는 전짓불 같았다. “음… 그냥 좀 힘들었나 봐. 그동안 많이 지쳤던지라 밖이랑은 단절된 채 공부만 하고 싶었어. 그냥 뭐, 공부하면서 잘 지냈어.” 그들이 들었을 때 가장 납득이 될 만한, 그럴싸한 대답을 골랐다.    

 내가 합격한 시험은 지방직 공무원 시험이었다. 선택한 지역은 나와는 크게 연고가 없는 지역이었다. 지방직 시험에 합격했을 때, 다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나 그 주변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지역을 듣자 하나같이 입모아 말했다. ‘아니, 그곳은 왜?’. 그 지역을 고른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이었다. 오빠의 죽음과 장례식을 겪으며, 내 최우선순위는 가족이 되었다. 인생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를 고르면, 그건 망설임 없이 가족이었다. 나에게 가족은 지금의 우리 가족뿐이지만, 부모님에게는 두 가족이 있다. 원래의 가족과 당신들이 새롭게 꾸린 지금의 가족. 부모님이 그 두 가족 사이에서 행복하게 노후를 보내길 바랐다. 점점 세상으로 나아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보내는 쓸쓸한 노후를 맞이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별 고민 없이 부모님의 친척들이 모여 살고, 외할머니 댁과 가까운 지역을 골랐다.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 다들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 피어올랐다. 아니, 부모님이 가족들이랑 모여 살라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을 간다고? 다들 이해하지 못했다. 납득되지 못한 대답에는 자꾸만 질문들이 더해졌다. 갑자기 그런 생각은 왜 하게 된 거냐고, 부모님 때문에 그 먼 곳으로 가는 게 말도 안 된다고.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은 결국 시험 커트라인 점수로 귀결됐다. 점수 맞춰 간 거 아니냐고. 내가 보낸 수험생활에도, 그리고 전국 어디를 써도 붙을 수 있었던 시험 점수에 자부심이 있었던 내게는 꽤나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냥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나았다. 그냥 시험 결과가 나빴던 수험생이 되는 게 나았다. 오빠를 이유로 꺼내 들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오빠 위에, 하얀 거짓말을 덮었다.


첫 발을 내디딘 사회에서

 친한 지인들에게 했던 말들은 ‘거짓말’보다는 ‘생략’ 혹은 ‘그나마 괜찮은 대답 찾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처음 내딛는 지역에서, 처음 경험하는 사회생활에서는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야 했다. 수도권에서 홀로 내려온, 나이가 어린 신입 직원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물론 관계를 쌓아가고, 정적을 해소하기 위한 간단하고 의미 없는 질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가족은 어떻게 되냐, 왜 수도권에 있지 않고 지방으로 내려왔냐, 다른 가족들은 지금 어디 살고 있냐. 어린 나이에 공무원을 선택한 이유가 있냐. 무엇 하나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기에, 남들이 보기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오빠 위에 하얀 거짓말을 한 겹 더 덮었다. 그리고 내 위에도. 거짓말을 한 겹 덮은 채 나아가는 사회생활은 답답했지만, 오빠를 지키고 싶었다.

 새롭게 시작한 이 지역에서는 크게 소리 내어 운 적이 딱 한 번있다. 최종합격을 하고 신규 공무원 인사기록 카드를 적으러 갔을 때였다. 별 고민 없이 술술 적어내리다가 한참을 멈춰 선 곳이 있었다. ‘가족관계사항’. 부모님 두 분을 먼저 적어 넣고, 다음 칸에서 손이 멈췄다. 등본을 떼든 가족 관계를 적든, 세 번째 칸에 있던 건 언제나 오빠였다. 그러나 그런 오빠가 이제는 없다. 오빠는 이미 사망신고 처리가 된 고인이었다. 오빠를 적어야 할까.


 숱한 ‘가족관계증명서’ 서류를 발급해 본 지금은, 고민도 없이 오빠 이름 석자를 적어내렸을 것이다. 사망한 고인도, 여전히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나오기에. 하지만 그때 나는 ‘살아있는’ 가족에 대한 사항을 적는 란인 줄 알았다. 오빠 이름을 적자니, 오빠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고인이었다. 오빠의 이름을 빼자니, 내가 오빠를 우리 가족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것 같았다. 무엇을 적든 비참했다. 오빠의 이름을 적는 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고, 오빠의 이름을 빼는 건 내가 오빠를 외면해 버리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오빠의 이름을 빼고 세 번째 칸에 언니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 그 밑에 내 이름을 적었다. 언제나 다섯 칸이 필요했던 우리 가족의 ‘가족관계사항’이었다. 내 선택에 의해 네 칸으로 마무리된 우리 가족. 내가 오빠를 외면한 것 같았다. 내가 오빠를 우리 가족에서 제외시켜 버린 것 같았다. 그게 너무 서러웠다. 비가 퍼붓는 여름날, 길거리에서 쪽팔린지도 모르고 엉엉 울어버렸다. 오빠에게 미안해서 차마 하늘은 쳐다도 보지 못한 채.

 어디를 가든, 새로운 집단에 속하게 되면 꼭 가족관계를 묻는다. 인사기록카드 때 오빠를 외면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심해서, 그리고 오빠는 어디에 있든 내 가족이기 때문에 언제나 5명이라고 대답을 한다. 부모님이랑, 오빠랑, 언니랑 저요., 하고. 그러면 가족관계에서 수많은 추가 질문들이 이어진다. 본가가 이 지역이 아닌 걸 알면 부모님이랑 언니 오빠는 어디 사냐고. 언니 오빠는 뭐 하냐고, 나이는 몇 살이냐고. 결혼은 했냐고.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부모님은 원래 살던 본가에 있고, 오빠는 (집과 가까운 추모원이지만) 본가 주변에 있고, 언니는 같이 살아요. 오빠는 31살에 멈춰있지만, 내 나이에서 8을 더하거나, 언니 나이에서 2를 빼서 대답한다. 언니는 아직 결혼을 안 했고, 오빠는 아마 결혼은 안 할 거 같아요.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나는 또 오빠를 속이고 있구나. 나는 또, 오빠가 여전히 있는 마냥 꾸며내고 있구나.

 2022년, ‘청년 월세 지원금’이라는 사업이 시행된 적이 있다. 특정 나이의 청년들의 월세를 특정 기간 동안 지원해 주는 사업이었다. 그때 당시 월세로 거주 중이었기에, 직장 사람들이 날 볼 때마다 신청하라고 알려주셨다. 그 제도를 담당하던 주사님은 친절하게 필요 서류와 절차까지 알려주며 꼭 신청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하지만 끝내 신청할 수가 없었다. 필수 서류 중 하나가 ‘부모님 기준 가족관계증명서(상세)’였기 때문에. 부모님 기준 상세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부모님의 부모,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이 기재된다. 부모님 기준으로 서류를 뗐을 때 오빠 이름 옆에 ‘사망’이 적혀 나올 그 서류를 차마 제출할 수 없었다. 이 사업 막 시행되고, 직장 동료분들은 나만 보면 그 사업 신청 여부를 물어왔다. 그래서 억지로, 그러나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할 일이 많아도 퇴근 시간이 되면 후다닥 사무실을 벗어났고, 업무 시간에는 항상 바쁜 척 무언갈 해댔다. 그렇게 열심히 피해도, 점심시간이면 어쩔 수 없이 질문을 마주해야만 했다. 자격 요건이 안 될 걸요, 혹은 바빠서 서류 준비하는 걸 까먹었어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리곤 했다. 내게는 그 백 몇십만 원의 돈보다, 그들에게 오빠가 살아있는 존재로 여겨지는 게, 그리고 내가 유가족이란 걸 숨기는 게 더 중요했다.


당신과 나를 지키는 방법

처음에는 오빠와 관련된 질문을 받는 게, 그리고 그 질문에 그럴듯한 대답을 꾸며내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오빠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면,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이 되새겨졌기 때문에. 그리고 오빠에 대해 떳떳하지 못하고 오빠를 숨기기 급급하다는 죄책감이 들었기에. 언제부터는 직장에서 가족과 관련된 질문을 받는 게 무서웠고, 나라는 사람이 거짓말투성이로 꾸며지고 있다고 느꼈다. 이런 거짓투성이의 상태로는 그 누구와도 진실된 관계를 맺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예전만큼 괴롭진 않다. 완전히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들의 쏟아낼 질문 자체가 두렵거나 오빠에 대한 죄책감에 속상한 날이 줄어들었다. 내가 그들을 향해 골라낸 거짓말은 내가 나와 오빠를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에. 오빠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 오빠를 입방아에 올리는 것으로부터, 스쳐 지나갈 인연들이 내뱉는 공허한 공감과 위로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말하지 못할 아픔 하나씩은 가지고 살아가며, 그 아픔은 가슴 저편에 간직한 채 세상으로 나아갈 때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감히 누가 그 가면을 나쁘다고 말할까. 그저, 스스로와 그 아픔을 지키는 방법일 뿐인 것을.


괜찮다. 내 아픔은 내가 온전히 준비되었을 때, 그리고 그 아픔을 온전히 품어줄 상대를 만났을 때에 비로소 꺼내보여도 된다.

그 누구도 진실 뒤에 숨겨진 아픔을 강요할 자격은 없다.

그리고, 누구나 그 아픔을 숨길 자격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한 문단을 인용하며 오늘의 글을 마친다.

순간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울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에는 너무나 나이를 먹었고, 너무나도 많은 경험을 해왔다.
이 세계에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고, 혹시라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런 슬픔은 다른 어떤 형태로도 바뀌어지지 않고, 다만 바람 없는 밤의 눈처럼 마음에 조용히 쌓여가는 그런 애달픈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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