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오빠의 자살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1)
초안,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
오빠. 처음에는, 절박한 마음으로 오빠가 떠나간 이유를 찾았어. 오빠의 선택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았거든.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았어. 그러나 다 부질없는 행동이더라. 우리가 몰랐던 오빠만의 고충이 있었겠지. 오빠만의 이유가 있었겠지. 이제는 더 이상 추측하지 않아. 그냥, 오빠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어.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오빠.
오빠가 죽기 전인 2019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을 결심했던 때가 있었다. 세상과 작별할 디데이를 정했다. 디데이 하루 전, 유서를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내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하여, 그리고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적어 내렸다.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적어간 유서는 에이포 4장이나 나왔다. 내 선택에 대해 합리화를 하고 싶었고, 이제 영영 보지 못할 이들이기에 남기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유서나, 짧은 메시지 한 줄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오빠가 죽기 한 달가량 전부터 자살에 대한 시그널을 보내왔던 건 가족을 통해 들었다.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자살 시도를 했다거나. 아무런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이 아니었다. 오빠의 선택이었고, 선택을 실행으로 옮기기까지는 꽤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건, 오빠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야속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남아있는 이들에게 한두 마디 말 정도는 남겨줄 수 있었잖아. 오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우리에게, 오빠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간단히라도 알려줄 수 있었잖아. 아니, 이유를 알려주기 힘들었다면 그냥 한마디 말 정도는 남겨줄 수 있었잖아. 나는, 나는 2019년도에 죽기로 결심하고 나서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어. 이제는 더는 볼 수 없으니까, 해주고 싶은 말들이 많았어. 원망스러웠던 마음, 고마웠던 마음, 미안했던 마음. 전하고 싶은 마음과 말들이 한가득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오빠는, 오빠는 우리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없었어?
하지만, 오빠를 지켜내지 못했던 내가, 오빠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내가, 감히 오빠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의미 없는 물음표만 끝없이 이어졌다. 미안해서 남길 수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남기고 싶지 않았던 건지. 준비된 선택이었던 건지, 아니면 충동적인 선택이었던 건지. 오빠의 신발장에 한 번도 신지 않은 채 놓여있던 운동화, 장례식 때 부의 봉투 대신, 이름이 적히지 않은 꽃무늬 편지봉투를 넣었던 누군가. 장례식 첫날, 오빠의 핸드폰으로 왔던 정신과 방문 예약 문자. 오빠의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의 내용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오빠의 죽음 뒤 남겨진 무수한 것들을 붙잡고 방황했다.
이유를 찾았던 날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빠 선택의 이유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는데도, 2020년의 나는 지독히도 오빠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찾았다. 오빠는 왜 유서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일까. 오빠를 괴롭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그 이유 때문이었을까. 남 보기 부러워 보이는 삶이라고만 생각했던 삶을 살아가는 오빠는, 그 삶을 살며 어떤 고통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가장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것은 유서의 부재에 대한 이유였다. 오빠는 왜,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선택이었을까. 충동적으로 저지른 선택이어서 유서를 남길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자살을 선택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유서조차 남길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없었던 걸까. 이런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갈 때면, 혹시 타살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빠의 사체 검안서에 적힌 사유는 명확히 자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군가 오빠가 그런 선택을 하도록 등을 떠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결국, 모두 내 추측일 뿐이었다. 이건 아닐까, 저건 아닐까. 유서가 없는 것에 대해 수없이 많은 추측을 했다.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찾아 헤매는 시간일 뿐이었다.
가장 간절하게 찾아 헤맸던 이유는 오빠의 선택에 대한 것이었다. 오빠는 왜, 그런 서릿발 같은 선택을 했던 걸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선택이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빠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유를 찾아 헤맸다. 오빠의 장례식 첫날, 오빠의 핸드폰에 남겨진 정신과 예약 문자가 지독히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빠도, 그 지독한 우울증이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잡아먹히고 있었던 걸까. 오빠를 괴롭히던 그 문제를 만나기 전부터 그래왔던 걸까, 아니면 만난 이후 그래왔던 걸까.
오빠의 책장에는 아이를 올바르게 교육하는 법에 대한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처음엔, 오빠는 아빠가 될 준비를 하고 싶었던 걸까, 싶었다. 그 책들의 의미에 대해 계속 곱씹어 보니, 오빠는 어쩌면 정신적인 혼란에 대한 원인을 찾아 헤맸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다 보면, 불안한 정신세계의 뿌리를 유년 시절에서 찾곤 하니까.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는 방법들을 알려주는 책들도 많았다.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는 방법, 무례한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대하는 방법. 단단하게만 보였던 오빠도, 실은 많이 아파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오빠의 선택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마지막 이유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에서 받은 정신적인 상처 때문이었을까.
언제나 단단하게만 보였던 오빠였다. 누군가 오빠를 비난하면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픽, 비웃고 마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의 신념이 뚜렷하고, 사회가 정하는 틀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틀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좋은 대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부서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이었다. 직장에서 잠시 흔들린 적은 있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들어갔으니 그런 흔들림조차도 멀리 봤을 땐 크게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자전거, 그림, 복싱, 바둑, 요리 등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는데, 그 삶을 살아가는 오빠는 불행했던 걸까.
무엇이 오빠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걸까. 오빠가 짊어지고 있었던 삶의 무게는 무엇이었을까. 오빠는 어떤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정답지를 잃어버린 문제를 풀려고 끊임없이 헤맸다. 남겨진 단서를 가지고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탐정처럼, 오빠를 힘들게 했던 것들은 무엇일까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이유를 알면, 부정하고만 싶은 오빠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답지를 잃어버렸기에, 결국엔 아무도 알 수 없는 답이었는데.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그저 존중해 주는 것뿐.
그렇게 이유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 문득, 오빠에게 미안해졌다. 자살을 택했던 오빠의 선택은, 하나의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을 텐데. 많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을 텐데. 오빠가 이 세상에서 내린 마지막 선택인데. 내 마음이 편하자고 그 결정에 대해 내 멋대로 추측하고 있었다는 게 미안했다. 답을 알려줄 오빠가 없는 지금, 내 추측들은 모두 ‘소설’ 일뿐이었다. 그리고 멋대로 내리는 추측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내 마음이 편해지자고, 내 멋대로 추측하고 결론을 내리는 행위 자체가 오빠에게 못할 짓 같았다. 오빠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선택을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해석해 버린다는 것이, 오빠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내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했는데, 그 과정도 모르는 타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그 이유를 추측하고 결론을 내릴 때만큼 불쾌한 것이 없었다. 그런 추측을 내게 들이밀 때면 매번 ‘당신들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하며 짜증이 났다. 내가 고심해서 내린 선택에 대해 당신들의 입맛대로, 당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당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서 결론을 내리는 행동들이 퍽 불쾌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나도 똑같은 짓을 오빠에게 하고 있었다. 내 마음 편해지자고 내 멋대로 오빠의 선택을 해석하고 결론 내리려고 했던 것이었다.
당사자가 정확한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남아있는 이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한 명의 이성적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결정을 할 때, 비단 한 가지의 이유만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삶에서 겪었던 여러 원인들이 중첩되어 그런 선택을 내리게 될 테니까. 감히, 우리는 그 이유를 판단하려고 들면 안 됐다. 설령 이유를 안다고 해도, 떠나간 이가 우리 곁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추측하는 것을 그만뒀다. 더는 이유를 찾아 헤매는 일을 그만뒀다. 오빠가 괴로워했던 이유를 찾을수록 오빠와 나는 함께 나락으로 떨어졌으니까. 한 개인의 삶을 모조리 알려고 하는 건 오만이다. 인간은 단순하지 않으니까. 한 개인은 무수히도 많은 생각과 경험들로 구성되어 있는 복잡한 개체니까. 너무나도 부족한 정보를 가지고 결과를 해석하려는 행동은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이유를 찾아 헤매는 그 행동은, 그저 남겨진 나를 위한 행동이었지, 떠나간 오빠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 끝에 남겨진 내가 택한 것은, 그저 떠나간 오빠의 마지막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라고 부정하는 대신, ‘많이 힘들었구나, 힘든 일들을 겪어내느라 너무 고생했어.’ 위로해 주고, ‘힘든 선택을 한 만큼, 거기서는 행복해’하며, 오빠의 마지막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었다.
오빠의 선택을 존중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오빠의 죽음 뒤에 남겨진 것들을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