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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11. 2024

오빠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것

제5장. 오빠가 내게 남겨준 것들(3)

떠나간 이들을 위하여, 남겨진 이들에게

초안,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



오빠. 나는 삶에서 지독한 시련이 다가올 때면 속으로 오빠를 불러. 오빠, 하고 불러보면 오빠가 그래,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듯해. 차마 직접적으로 도와달라는 말은 못 하고, 오빠가 지켜주지 않을까, 하고 소심하게 생각하기도 해.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거짓말 같게도 두려움이 사라져. 고마워 오빠. 존재만으로도 이렇게 든든한 사람이어 줘서.



오빠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것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기에

 어렸을 때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먼저 하늘로 간 사람에게 그들의 안녕을 부탁하는 장면이 종종 나왔다. 꽤나 어렸을 때는, 어디서든 저렇게 소원을 빌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좋겠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를 지켜줄 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 그 사람이 나를 지켜줄 것을 믿으며 힘을 얻는다는 것. 생각만 해도 든든해 보였다. 그때의 나는, 철없게도 하늘에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가 있어서 저렇게 나를 지켜줬으면, 하고 바랐다.

 막상 오빠를 하늘로 먼저 떠나보내고는, 오빠를 향해 나를 위한 사소한 소망 하나 비는 게 쉽지 않다. 혹여나 망자가 인간의 일에 간섭했다는 이유로 신의 노여움을 살까, 싶어서. 혹은 오빠가 내 부탁을 들어주느라 본인에게 남아있는 에너지를 사용해 버려서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질까, 싶어서. 무뚝뚝하지만 착한 우리 오빠는, 본인이 신의 노여움을 얻어 고통스러워지더라도 남아있는 가족을 지켜줄 사람이었다. 내 사소한 소망을 기어코 이루어줄 사람이었다. 내가 오빠에게 받는 도움으로 인해 오빠가 조금이라도 해를 입는다면, 그 어떤 것도 무의미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 전날, ‘오빠, 내일 내가 떨지 않고 내 실력만큼 풀고 나올 수 있게 도와줘.‘ 그 한 마디조차 가슴에 품지 않았다. 그 어떤 성공도, 부귀영화도, 오빠의 안녕과 맞바꾼 것이라면 아무런 의미조차 없었다. 현실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불운을 껴안은 마냥 불행한 삶을 산대도 하늘에서의 오빠를 지킬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냥, 오빠가 ‘책임’, ‘도움’, ‘장남’과 같은 무거운 짐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하늘을 떠도는 존재가 되길 바랐다.

 하늘에서 있는 오빠는,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 힘이 되어준다. 그저 오빠라는 존재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도 몰랐던 힘이 생겨난다. 그래서 오빠에게 더,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해도 오빠는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스스로에게 떳떳한 만큼 오빠에게 떳떳할 수 있으니까 더 정직하게, 더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빠에게 떳떳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오빠에게 쪽팔리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이 두 가지를 생각하고 살아간다. 오빠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내 마지막 하한선을 만들어준다. 삶을 살아가다 위기를 맞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찾아와 삶의 하한선이 가까워오면 기를 쓰고 올라간다. 딱 여기까지. 더 내려가면 오빠한테 보이기 부끄러워. 다시 올라갈 용기가, 에너지가, 의지가 있든 없든 하한선이 보이면 올라가고 싶었고, 올라가야 했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오빠가 있기에. 회복 탄력성이 지독히도 낮아 한 번 내려가면 꼭 밑바닥을 찍고야 말았던 과거의 나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누구보다 내 편일 오빠이기에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요행을 바라지 않는 편이다. 딱 노력한 만큼만, 받을 만한 만큼만. 그래서 좋은 결과를 내게 해달라느니, 문제를 저질러놓고 별 탈없이 지나가게 도와달라느니, 하는 요행이 담긴 소원을 빌어본 적이 거의 없다. 삶은, 내가 노력한 그만큼 가치 있어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내 가치는 운이 정하는 게 아니라, 운명이 정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가 만들어간다고 생각하기에. 나조차도 요행을 바라는 성미는 아니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혹여나 오빠가 내 요행을 바라는 욕심을 들어주다 해를 입을까 봐 그런 소원은 빌지 않지만 가끔 피식, 거릴 만한 상상을 하곤 한다. 날 괴롭게 하는 인간 뒤통수 정도는 몰래 날려줄 수 있잖아. 굳이 그 사람에게 큰 해를 가하지 않아도, 지나가다 등골이 오싹하게 만들어줄 순 있잖아. 그렇게 소심한 나 대신 소심한 복수는 해줄 수 있잖아.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괜히 든든해진다. 언제나 존재하는 오빠는, 내가 만나는 숱한 타인들 속 누구보다 내 편일 테니까.

 조금 횡설수설하는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나를 짜증 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마 직장에서 만난 사람일 테고, 나는 저연차 막내니까 그 사람에게 함부로 해를 입힐 수도, 군소리를 쉬이 내기도 어렵다. 이런 사소한 일로 오빠에게 징징거리고 싶지도, 오빠에게 무언가 부탁하기도 싫다. 하지만, 왠지 오빠라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집 가는 길에 모올래 뒤통수를 한 대 날려줄 것만 같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면 괜히 어깨가 우쭐해진다. 누구보다 내 편일 오빠가,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이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요새는 세상에 나아갈 때 겁이 꽤나 없어진 것 같다. 오빠가 나와 함께 해주고 있는데. 뭐가 무서워. 오빠가 무언갈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에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냥, 누구보다 내 편일 사람이 나와 함께 있다는 생각에 괜스레 용기가 솟아오른다.


 나의 어제에도, 오늘에도 오빠가 있다.

권진아의 <위로>라는 노래를 참 좋아하는데, 이런 가사가 있다.


나의 어제에 그대가 있고
나의 오늘에 그대가 있고
나의 내일에 그대가 있다
그댄 나의 미래다


행복했던 어제에도, 고단했던 오늘에도, 설레는 내일에도 오빠는 나와 함께한다. 기특했던 어제의 나를, 어리숙했던 오늘의 나를, 그리고 그것들을 거름 삼아 성장할 나를 오빠는 지켜봤고, 지켜보고, 지켜볼 터이다. 가끔 지독한 공허가 찾아올 때, 텅 빈 외로움이 찾아올 때 나와 함께하고 있을 오빠를 떠올린다. 오빠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오빠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드넓고 냉정한 세상 속 혼자가 아니라는 걸 종종 깨닫는다. 가끔 겉모습으로만, 결과로만 판단하는 세상에 속상할 때도 있다. 보이는 것이 다인 세상에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오빠를 생각하면 그런 세상의 잣대쯤은 괜찮아진다. 모두가 몰라준 대도, 오빠는 알고 있으니까. 내가 세상에서 제일 동경했던 사람, 그 누구보다도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나의 어제에도, 오늘에도, 내일에도 오빠가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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