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 문학적 표현에 딸의 뇌는 일시 정지. 평소 기억하는 아빠의 언어와 사뭇 다르다. 동화책 속 괴물처럼 표현한 물건은 호텔에서 흔해 빠진 온풍기다. 조금 전 기계에서 찬 바람이 나오는 것 같아서 리모컨 버튼을 아무거나 눌렀다. 만질수록 헷갈리길래 차라리 기다리면서 뜨거운 바람이 제대로 나오는지 지켜보았다. 뭔가 알아냈는지 침대에 기대어 물끄러미 난방기구를 바라보던 아빠가 툭 던진 한 마디였다.
아침마다 네팔 카트만두로 자꾸 문학 소년이 찾아온다. 아빠가 호텔 조식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빵과 커피 같은 서양식도 있었지만, 메뉴 중 일부는 생소한 네팔 음식이었다. 낯선 비주얼에 끌렸는지 접시를 들고 주저한다. 영어가 서툰 편이라 마음대로 추측하기도 하고 아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딸에게 질문한다. 이른 아침부터 과도하게 열정 가득한 목소리다.
“선혜야, 빨리 이리로 와 봐.
이건 뭐야? 이거 맛있어 보이지 않아?”
음식의 이름이나 재료를 알려주면 조금씩 담아서 맛본다. 아침 미식회가 열려 맛을 설명해주고 정말 맛있는 건 딸의 접시에 덜어준다.
조식 먹는 식당에서 창 밖을 구경하는 아빠
다음 날 아침,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향한다. 이동하며 느끼는 피로를 최대한 줄이려고 7시간이 넘는 버스 대신 비행기를 선택했다. 네팔 예티 항공사(Yeti airline)의 포가라 행 비행기는 고속버스처럼 한 시간 단위로 있고, 겉모습도 마을버스 느낌이 물씬 풍긴다. 기체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 2명씩 앉을 만큼 작고, 날개엔 거대한 프로펠러 달려있다. 제발 무사히만 도착하길 바라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무지막지한 프로펠러 소리를 막기 위해 한국에서 준비한 귀마개를 아빠에게 건네자 작은 비행기가 힘겹게 떠오른다.
아빠의 눈빛이 또 달라졌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소년의 눈에 작은 비행기의 이륙을 향한 감탄이 덧대진다. 기분 좋은 놀라움에 입을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어느새 안정권에 들어선 비행기는 우려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승무원이 복도를 오가며 솜뭉치와 사탕을 바구니에 담아 들고 나눠준다. 기내 곳곳에서 하얀 솜을 뜯어가며 귀를 막는 모습이 별나다. 항공사 이름이 적힌 사탕을 먹자 코 깊숙이 박하 향이 퍼지고 입에 침이 고인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은 청량하고 만년설 쌓인 산의 꼭대기가 점차 고개를 든다.
작은 창문에 아빠의 오래되고 거대한 꿈이 가득 채워진다. 눈 쌓인 지붕은 마치 짙은 회색 마블링이 새겨진 깨진 대리석 조각 같고 산 아래는 나무의 뿌리처럼 산맥이 울퉁불퉁하고 넓게 펼쳐져 있다. 산세 사이 움푹 파인 부분에 작은 점이 된 건물들이 콕콕 박혀 있다. 비행기 속도와 버금가는 구름이 빠르게 마을을 뒤덮는다. 아빠의 입이 귀에 걸렸고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그동안 '아빠'라는 이름에 가려져 다양한 모습이 보지 못한 게 아닐까? 아빠와 딸의 나이 차이는 34살이다. 머리가 클수록 벌어진 세월이 주는 거리감을 줄일 수 없었다. 한잔 걸친 술기운에 흥 오른 상태로 옛날이야기를 꺼낼 때, 농담으로 꺼낸 이야기가 전혀 웃기지 않을 때, 어제 분명히 가족들과 함께 말한 내용을 처음 들은 것처럼 다시 물어볼 때, 사소한 문제에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우리 사이에 벽이 두꺼워졌다.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입을 삐죽거린 채 퉁명스럽게 말하곤 했다.
“아빠 완전 옛날 사람 같아!”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아빠의 어떤 모습을 만날까? 가끔은 온갖 걸 신나게 물어보는 아빠가 귀찮아 투정을 부리지만, 꿋꿋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어보면 좋겠다. 잊지 말자. 아빠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호기심 어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