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는 내가 정말 아끼는 아이였다. 반장도, 부반장도 아니었지만 학급의 중심에 서서 크고 작은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체육대회 준비에서는 반티선정을 담당하며 친구들의 의견을 조율했고, 생일파티 담당자를 정할 때도 자신이 맡겠다고 했다. 은채가 솔선수범하며 나서니 학급에는 자연스럽게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졌고, 그녀의 행동이 다른 아이들의 분위기까지 긍정적으로 이끌었다.
그런 은채가 고마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 내가 은채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은채가 힘든데 말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늘 신경 써서 말했다.
“은채야, 힘들면 꼭 말해. 네가 다 하지 않아도 돼.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친구들과 나눠서 해도 괜찮아.”
그러면 은채는 늘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선생님!”
그날은 1학기 모범학생을 추천하는 날이었다. 다른 반에서는 주로 반장이 추천되곤 했지만, 우리 반에서는 단연 은채였다. 은채의 헌신적인 태도,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스스로 솔선수범하며 만들어낸 결과까지 어느 하나 빠질 것이 없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은채를 추천하며 그녀에게 내 고마운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추천을 마친 뒤 다른 업무를 보고 있을 때 은채가 학급 행사 준비로 교무실에 찾아왔다. 몇 가지 일을 부탁한 뒤 나는 늘 하던 말을 덧붙였다.
“정말 고맙다, 은채야. 그런데 힘들면 꼭 말해야 해. 네가 다 하지 않아도 돼.”
그 말을 듣던 은채의 표정이 잠깐 멈췄다. 평소처럼 씩씩한 얼굴이었지만, 아주 잠깐 시선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선생님!”
나는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가 내게 건넨 웃음이 조금은 억지스러웠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날 오후, 은채는 머리가 아프다며 조퇴를 요청했다. 어머니와 통화한 뒤 조퇴를 허락했지만, 마음에 걸렸다. 아침까지도 그렇게 밝던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조퇴한 은채가 신경 쓰여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은채 아침부터 아팠던 거야? 내가 너무 많은 걸 부탁했나?”
친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샘, 은채가 머리보다 마음이 아픈 것 같아요. 샘이 예전부터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자꾸 친구들과 일을 나누어 하라고 한다고요."
그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가 은채를 배려하기 위해 한 말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상처를 준 것이다. 내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던 아이가 내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고 느꼈다니 나는 아주 속상했다.
나는 교무실에서 한참을 울었다. 몇몇 선생님들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지만,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음이, 사랑이 이렇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구나.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가 내가 자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 사실이 너무 아프고 서글펐다.
울면서도 나는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내 사랑이 왜 그녀에게 닿지 못했던 걸까? 처음에는 내가 잘못한 것만 같았다. 내가 무엇을 놓친 걸까? 진심이 부족했던 걸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할수록 그 원인이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채는 내가 준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는 내 마음을 오해했을 수도 있고, 그 사랑이 그녀에게는 너무 낯설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진심으로 다가가도, 그녀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팠다.
문득,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나도 은채처럼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선생님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친구들조차 나를 진심으로 아끼지 않는다고 여겼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응원과 격려조차 형식적인 것으로 느껴졌고, 나는 모든 사랑을 의심했다. 그 결과, 나는 점점 더 고립되었고 외로움은 나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 외로움은 어른이 되어서도 나를 따라다녔다. 교사가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선생님 좋아요!”, “선생님 정말 최고예요!”라고 말하면, 나는 그것이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내 안에 자리 잡은 의심은 나의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고, 나는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것은 모두 진심이었다. 엄마의 사랑도, 선생님들의 관심도, 친구들의 애정도,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도 모두 진짜였다. 그 사랑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내가 스스로를 가두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이다. 은채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의 애씀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지만, 동시에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외로움의 방어벽이기도 했다.
결국 내가 전한 사랑은 왜곡된 채로 나에게 상처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받지 못한 사랑은 내 안에서 무거운 짐이 되었고, 나를 자책하게 하며 나를 깊은 슬픔 속으로 빠뜨렸다. 그렇다면, 예전 내가 받지 않았던 사랑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도 나를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상처로 남았던 것은 아닐까? 나의 외면으로 인해 그들도 외로움을 짊어지게 된 것은 아닐까?
그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나를 품에 안으려 했던 순간,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며 건넨 따뜻한 말들, 친구들이 나를 위로하려 했던 마음들. 그 모든 사랑을 내가 외면했을 때,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를 사랑하려고 다가갔던 그 마음이 내가 쌓아올린 벽에 부딪혀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도 상처로 남았을까?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외면했던 사랑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외면했던 순간에도 그 사랑은 흩어지지 않고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분명히 닿지 못했을 텐데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사랑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내 안에 쌓였고, 그 존재를 몰랐던 시절에도 나를 어딘가에서 지탱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은 닿지 못했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은채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동시에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사랑하려 했지만 닿지 못했던 순간들, 그리고 닿으려다 멀어진 사랑들이 떠올랐다. 그 사랑들은 여전히 내 안에, 그리고 어딘가에,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문득,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떠올랐다. 닿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빛처럼.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