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고 봐 줄 이유는 없잖아요."
교실이 흔들리도록 여학생과 크게 싸운 후 지훈이의 말이었다. 남녀는 동등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라서 차별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녀석의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부반장이라고 담임 교사는 어찌나 챙기는지 그 아이의 모순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찾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렇게 스무살이 넘고 군대도 다녀온 지훈이에게 전화가 왔다. 스승의 날을 맞이 하여 겸사겸사 인사차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통화의 마지막 즈음에 보근이에 대해 물었다.
"근데 선생님, 우리반 보근이라고 기억나세요?"
물론 기억한다. '보글보글'과 어감이 비슷해서 '보근보근'이라고 몇 번 놀려 먹기도 했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학교에서 맨날 잠만 잤잖아."
보근이는 항상 피곤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자주 잠을 자곤 했다. 또 몇 번 지각을 하기도 해서 진지하게 불러 상담을 했었다. 상황을 들어보니 부모님은 맞벌이로 바쁘시고 초등학생 동생을 온전히 보근이가 키우고 있었다. 하교 후에도 친구와 노는 법 없이 서둘러 집으로 가서 간식을 챙기고, 저녁을 먹이고, 숙제를 봐주고, 씻기고, 잠까지 재운다고 했다. 아침 등교 역시 보근이가 모두 담당하고 있었다. 보근이는 자신을 위한 시간이 하나도 없이 육아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듣고 나는 보근이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었다.
"늦지 않게 학교에 와. 자더라도 학교는 꼭 오고."
내가 보근이에게 요구한 것은 이것이 다였다. 내 수업시간에도 자주 졸았지만 가끔은 깨우고 까끔은 재우고 그랬다.
"얼마전에 아이들이 모였는데 보근이가 왔더라고요. 보근이도 어른이 되었어요. 그래서 중3 때 맨날 자던 걸로 놀려먹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때 우리반 수업을 들어오는 모든 선생님들이 보근이를 혼내는데 담임 선생님이 혼내지 않아서 고마웠다는 것이다. 왜냐하고 물으니 친구들은 보근이 사정을 다 알고 보근이가 안 됐다고 생각하는데 매 시간마다 존다고 보근이가 혼나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보근이를 혼내지 않아서 좋았어요."
아이들도 사정이 다 있었다. 늦는 아이는 늦는대로, 수업 준비가 안 된 아이는 그런대로, 선생님에게 반항하는 아이들도 모두 다 사정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사정은 차치해버리고 내 요구만 충족하려고 했던 내 모습도 있었다.
그리고 물론 부모님도 모두 사정이 있을 것이다. 맞벌이를 해야하는 사정, 동생을 형에게 맡겨야만 하는 사정. 그렇지만 나는 보근이의 담임이니까 보근이만 보았다. 조금이나마 보근이가 편했으면 했다. 그렇게 보근보근 잠만 자던 보근이도 어른이 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