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by 이오샘

“선생님, 여권이 없어요.”


공항에서 티케팅을 하려던 순간, 미니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일 교환학생을 떠나는 날이었다. 꼼꼼히 짐을 챙겼을 그녀가 여권을 집에 두고 왔다니. 나는 처음으로 미니가 허둥대는 모습을 봤다. 서둘러 미니의 집으로 돌아가 여권을 가지고 오는 동안에도, 그녀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정말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아슬아슬하게 입국장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웃었다. 그렇게 작은 허둥거림조차 미니답다고 느꼈다.

입국장으로 들어가는 미니의 모습을 보며, 처음 그녀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30명 남짓의 중학교 1학년을 맞이했다. 그 중 138cm로 반에서 가장 작았던 미니는 느린 행동과 꼼꼼한 성격으로 단연 눈에 띄었다. 매 수업시간을 꼼꼼히 준비하고, 글씨도 천천히 썼다. 종례가 끝난 뒤에도 홀로 교실에 남아 서랍을 정리하고 사물함을 정리하는 모습은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줬다.


“미니야, 이렇게 천천히 정리하다 집에 못 가는 거 아니야?”


“그래도 다 정리하고 가야 내일 찾기 쉬워요.”


그녀의 말은 단순하지만 묵직했다. 천천히 가더라도 끝까지 자기 일을 완성하려는 미니의 태도는 아이답지 않게 단단했다. 그런 미니를 바라보며 나는 가끔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저렇게 느려서야, 지금은 공부를 좀 하는 것 같아도 고등학교 가면 절대 안 될 걸.”


어떤 선생님이 미니를 걱정하는 듯 험담하는 듯한 말을 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곤 했다. 미니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중시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아이였다. 그런데도 나 역시 조바심에 그녀를 재촉했던 적이 있었다. 돌아보면 흔들린 것은 미니가 아니라, 미니를 믿으면서도 끝까지 확신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었다.


어느덧 미니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나는 다시 미니의 담임이 되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여전히 조용하고, 한결같았다.


“선생님, 이번에도 해볼까요?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중학교 1학년 때 미니를 위시하여 몇몇 학생들을 데리고 각종 교외 대회에 참여했다. 이전에는 교외 대회에 관심있는 학생을 구하기 힘들어 잘 참여하지 못했는데 미니가 우선 참여를 이야기하니 그 주변 친구들도 하나, 둘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백일장이나 시낭송대회 등 각종 대회에 참여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이들은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더 넓은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고 있었으니까. 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느리지만 흔들림 없이, 자기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미니가 한자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해서 조금 의아했던 일이 있다.


“책을 읽다 보니 한자 공부가 필요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좀 해보려고요.”


몇 달 다니다 그만둘 거라 생각했다. 공부가 한창 바쁜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졸업할 때까지 1년을 꼬박 다녔다. 그녀의 꾸준함은 늘 예상 밖의 방식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미니는 매년 설날, 스승의 날, 추석마다 짧은 안부 문자를 보내왔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항상 감사합니다.”


그 작은 연락 속에는 그녀의 꾸준함과 변함없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수능이 끝난 후 몇몇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3년만에 미니를 만났다.


“선생님, 저는 아직 대학이 정해지지 않았어요. 면접 준비 중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요.”


다른 친구들은 대학 합격 소식을 전하며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지만, 미니는 차분하게 자신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이화여대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이뤄낸 그녀다운 결과였다.


“선생님, 독일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요. 세상은 정말 넓더라고요.”


여권을 두고 왔던 공항에서의 에피소드가 일어나고 1년 후 미니는 1년간의 독일 교환학생 생활과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미니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말투와 생각에는 깊이가 더해졌고, 미니와 나누는 대화는 편안했다. 더 이상 우리는 스승과 제자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미니가 어른이 되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미니는 나보다 더 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가르쳤던 시간보다 그녀 스스로 성장하고 있던 시간이 더 컸다는 사실이 와 닿았다.


헤어지기 전, 미니는 이제 진로를 정했고 법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그녀의 목표는 여전히 조용하지만 확고했다. 늘 그랬듯, 미니는 자신의 속도로 차분히 준비해 나갔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의 태도에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1년간의 노력 끝에, 좋은 결과를 전해 주었다. 미니는 한 번도 서두르지 않았지만,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지금 미니의 키는 154cm. 미니는 여전히 작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끈기와 신뢰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다. 근 10년 그녀의 성장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 나는 미니를 통해 천천히 걸어도, 느리지만 단단히 걸어가면 결국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미니는 그런 아이였고, 그런 그녀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내게 더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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