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촌뜨기라니요? 반아이들 전체를 그렇게 취급했다는 말을 듣고 진짜 어이가 없더군요."
교감 선생님은 학부모님의 말씀을 전하며 덧붙이셨다.
“아버님이 많이 불쾌하셨던 것 같더라고. 아이도 꽤 속상해한 것 같으니까, 샘이 아이랑 직접 얘기해 보면 좋겠어요.”
나는 순간 멍해졌다. 평소 우리 아이반 아이들은 숨만 쉬어도 예쁘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지도해왔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가 우리반 아이들을 '촌뜨기'라고 무시했다고? 평소 생각지도 않고 사는 이런 단어가 어떻게 내 입에서 나와 아이에서, 학부모에게 그리고 교감 선생님께 이어져 나에게로 돌아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촌뜨기?’
내가 정말 그런 단어를 사용했단 말인가? 도대체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건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아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면 내가 무심코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어려웠다. 결국 아이를 불렀다.
“선생님이 미안한데, 네가 ‘촌뜨기’라는 말 때문에 속상했다고 들었어. 그런데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네. 혹시 알려줄 수 있을까?”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은지가 전학 왔을 때요. 선생님이 은지는 서울에서 왔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촌뜨기라고 하셨어요.”
아, 그때! 그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나는 은지를 소개하면서 분명 그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무심코 ‘촌뜨기’라는 말을 한 건, 단순히 은지가 서울에서 왔다는 걸 이야기하려던 거였다. 특별히 부정적인 의미를 담으려던 것도 아니었고, 지역적인 우열을 구분하려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은지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친절히 대해달라는 요청의 의미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서울’과 ‘촌뜨기’라는 대비가 다른 감정으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은지와 자신들을 비교하며 무의식적으로 열등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단어는 학부모에게까지 전달되며 점점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받았던 것 같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단어가 가진 힘은 그 자체로 충분히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혹시 선생님이 그 말을 다른 때에도 한 적 있니?”
“아뇨, 없어요. 은지 전학 왔을 때 딱 두 번 하셨어요.”
상황과 횟수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그 단어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인상을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랬구나. 선생님이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지만, 네가 속상했다면 정말 잘못한 거야. 미안해.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
아이와의 대화를 마친 뒤에도 마음이 무겁고 혼란스러웠다. 진심으로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왜 그런 단어를 사용했는지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책상 위 교과서를 펼치는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황순원의 소나기. 바로 그 장면이었다.
서울에서 온 소녀는 분홍 스웨터를 입고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골 소년은 그런 소녀를 보며 설렘을 느꼈지만, 개울물에 비친 까맣게 그을린 자신의 얼굴을 보고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물속의 모습을 지우려는 듯 물을 흩뜨려 버린다.
은지가 전학을 왔을 무렵, 나는 아이들에게 소설 소나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소녀와 시골 소년을 대비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무심코 ‘촌뜨기’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 같다. 아마 아이들 역시 소나기의 이야기를 통해 서울 아이와 시골 아이를 비교하며, 자연스럽게 은지와 자신들을 대조적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나는 다섯 반에서 같은 작품을 반복해 가르치다 보니 그 단어를 무심코 사용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비하의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모든 것은 내가 소나기라는 작품에 깊이 몰입한 상태에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학부모의 반응을 보며, ‘촌뜨기’라는 단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게 되었다. 어쩌면 아이들과 학부모는 그 단어를 듣고 스스로 마음 한편에 자리한 열등감이나 민감함이 건드려져 더 뜨끔했을지도 모른다. 그 단어는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자신들이 평가받고 비하당했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단어를 무심코 사용하며, 내 안에 있던 무심함과 편견이 드러났음을 깨달아 뜨끔했다. 무의식적인 구분 짓기가 생각지도 못한 단어로 흘러나와, 내 수준을 세상에 드러낸 셈이었다. 듣는 사람도, 말한 사람도 서로의 약점을 들킨 듯한 기분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결국 말이라는 건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 모두를 비추는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제부터 ‘촌뜨기’는 나의 금지어다. 말이라는 것이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숨겨두고 싶은 무언가의 버튼을 누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버튼이 눌려서 불편한 마음이 튀어나오는 건,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서로가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특히 나 자신이 타인의 그 버튼을 다시 건드리는 일은 피하고 싶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