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의 방
외할머니는 어릴 때 나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다.
엄마보다도 나랑 성격이 더 닮았달까.
밝고, 화통하고, 친구를 잘 사귀고, 말하는 걸 좋아하고, 꾸미는 것도 좋아하셨다.
입술에 구찌베니(립스틱)를 바르고, 분칠을 하고, 구두를 신고, 단정한 옷에 바느질까지 곱게 해내던 사람.
손끝이 야무지고, 마음이 따뜻하고, 나를 향해선 더없이 부드러웠다.
“미야~”
그 부르던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미야 할매' 로 통했다.
동네에서 '미야네 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는 그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만큼 외할머니는 어린 시절 돈 벌러 나간 엄마의 빈자리를 가만히 채워준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러, 외할머니는 큰아들 내외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셨다.
말하자면 귀농이었지만, 사실상 외할머니에게는 ‘지옥행’이었다.
가까운 마트도 차 없이는 못 가는 외딴곳.
도시에 살면서 이웃들과 수다 떨고 친구 만나던 분이, 그곳에서 우울증이 깊어졌다.
게다가 큰외삼촌은 그 누구보다도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상스러운 욕설과 손찌검은 기본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외도와 존재하지 않았던 호적상 동생에 대한 원망은 끝내 그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외할머니는 큰아들의 눈치를 평생 봤지만, 결국 나이 들고 갈 곳 없는 선택 끝에 그 집에 들어갔던 거다.
엄마가 투병 중일 때,
큰외삼촌은 끝내 외할머니를 대구로 데려오지 않았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결국 서로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이별했다.
엄마의 장례식날, 외할머니는 상이 차려지기도 전에 잠깐 왔다가,
엄마의 임종도, 입관도, 화장도, 모두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그것이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모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 일은 평생 내 가슴 속에 쿵, 눌러앉아 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 할머니는 더 단단해진 듯했지만 한편으론 한없이 부서진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집에 혼자 남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고요한 틈마다 엄마를 찾았다.
그 말은 눈물도 없이 툭, 떨어졌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늘 쉰 기침처럼 떨리고 있었다.
나도 엄마처럼 울고 싶었지만, 그때의 할머니 앞에서는 울 수 없었다.
엄마 없이 남은 우리 둘이 함께 버티기로 했으니까.
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었고, 걷는 것도 느려졌다.
그래도 매일 아침 이불을 개고, 하루를 맞이했다.
그 '지옥' 이라는 큰외삼촌의 집에서 말이다.
큰외삼촌이 없을 틈을 타서 오래된 핸드폰을 들고
서울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90살의 노모가 30대의 외손녀와 통화하는 것도 꼴보기 싫은 큰외삼촌이였다.
나는 뭐라할 것 없이 외할머니의 하루를 같이 정리해줬다.
퇴근 길에는 전화를 꼭 걸었고,
시시콜콜 또래친구들과 수다떨듯이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 했다.
우리는 나이차이가 60살 가까이 났지만 외할머니와 떠드는 수다는 1시간도 훌쩍 넘었다.
우유는 어떤 걸 좋아하셨는지, 약은 몇 시에 드셨는지,
할머니의 옷장엔 어떤 옷이 편한지, 그런 것들을 하나씩 기억해두었다.
언젠가 혹시 할머니가 누워버리면 내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 예감은 몇 달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요양병원 침대에 누운 할머니는 처음엔 내가 오는 걸 싫어했다.
서울에서 의성에 있는 병원까지는 하루에 2번 다니는 기차를 타야만 했고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꽁꽁 언 겨울이면 칼바람을 맞써고 눈바람을 이겨내며 병원을 찾았다.
“미야... 니 이제 우예 살래...”
그 말을 참 많이도 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나 잘 살고 있어, 걱정마.” 웃으며 말했지만,
외할머니는 그걸 믿지 않으셨다.
손을 꼭 잡고, 멍한 눈으로 “그러지 마라, 힘들지 마라, 오지마라" 라고 속삭였다.
나는 그날들이 오래 갈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할머니는 사람을 헷갈리기 시작했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고, 섬망 증세로 밤이면 고향 마당을 찾고,
죽은 외할아버지를 부르고, 어린 나를 찾고, 엄마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슴이 사무치게 쪼여오는 듯 했다.
마치 타임머신처럼 할머니를 현재로 데려오기 위해서 부던히도 노력했다.
하늘의 신이 마치 할머니에게 선물이라도 선사한듯
'망각'의 선물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겨울 얼음이 조금씩 녹고 요양병원에도 봄기운이 조금씩 왔다.
할머니가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미야..나는 벚꽃필 때 갈란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마음이 울컥했다.
그게 마지막 의식이 있는 말이었다.
그 후로 할머니는 거의 잠든 사람처럼 말을 잃고,
눈빛도 멀어지고, 시간이 무심하게 흘렀다.
나는 할머니에게 했던 마지막 질문을 아직도 기억한다.
“할머니, 내 키우는 동안 뭐가 제일 기억나요?”
"다...! 다 좋았지"
할머니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게 나에 대한 마지막 응답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마지막 의식이 또렷했던 어느 날, 외할머니는 말했다.
“소라 보고싶다... 동촌석이 보고싶다…”
마지막을 준비라도 하려는 듯, 하나둘씩 남은 인연들을 찾아주길 바랬다.
그리고 그날 밤,
돌아가신 엄마의 휴대폰이 1년 반 만에 울렸다.
그 전화는,
외할머니가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동촌석이의 엄마,
외할머니에게는 동서였다.
“큰집 형님이 전화가 안 돼서 수첩 뒤적이다가 미야엄마한테 걸었는데... 전화는 왜 미야가 받노?”
나는 그 수화기 너머로,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그렇게 단절되었던 가족들의 연결이 다시 이어졌다.
큰외삼촌 때문에 멀어졌던 삼촌들, 이모들, 친척들이
하나 둘 다시 외할머니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7일 후,
외할머니는 여한없이 모든 이에게 인사를 다 마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날, 나는 한쪽에 앉아 바나나우유를 꺼냈다.
엄마와 할머니가 제일 좋아했던 그 우유를, 조용히 뚜껑을 따고
할머니에게 먼저 건넸다.
이젠 더는 줄어들지 않는 그 우유를 앞에 두고, 나는 혼자 마셨다.
그때 깨달았다.
사랑은, 함께 나눌 수 있을 때보다
혼자서 지켜낼 때 더 깊어진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할머니를 생각한다.
분칠하고 구두 신고 머리 손질하던 모습,
‘미야~’하고 나를 부르던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끝까지 내 손을 잡고 걱정하던 그 따뜻한 손끝의 기억.
그게 나를 사람으로 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