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 구석에 쌓인 박스 하나를 꺼냈습니다.
테이프의 색이 바래 있었고, 겹겹이 쌓인 먼지가 얇은 막처럼 손끝에 붙었습니다. '겨울 옷'이라고 적힌 글씨는 희미했지만, 그 안에는 계절이 여전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박스를 열자, 오래된 냄새가 공기 속에 흩어졌습니다. 가볍게 접힌 니트, 아이가 입던 패딩, 그리고 맨 아래에는 얇은 분홍색 다이어리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 다이어리는 2년 전 겨울, 쌍둥이들이 네 살이던 해에 썼던 것이었습니다. 표지에 붙은 스티커는 가장자리가 벗겨져 있었고, 글씨는 조금 흔들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그때의 나'가 또박또박 살아 있었습니다.
2월 22일 — 오늘은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었다.
장갑이 젖어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내 손이 더 차가웠다.
그래도 행복했다.
짧은 문장 몇 줄이었지만, 그날의 공기가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손끝이 하얗게 얼던 느낌, 아이들의 웃음소리,그리고 그 뒤에서 그저 바라보던 나의 모습까지.
옷을 꺼내 접으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정리란 결국, 한 계절을 끝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남편이 옆에서 말했습니다.
"이건 너무 작잖아. 이제 버리자."
제 손은 옷자락을 한 번 더 매만졌습니다. 작은 단추, 바랜 소매, 세탁에서도 지워지지 않은 얼룩. 옷이 작아진 걸 알면서도, 입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아이들을 불렀습니다.
"얘들아, 이 옷 한번 입어볼까?"
쌍둥이들이 달려왔습니다. 패딩 소매에 팔을 끼우다가 막혔고, 단추는 끝까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엄마, 이거 아기 옷이야?"
"응. 너희가 네 살 때 입던 거야."
"우리 진짜 이렇게 작았어?"
"응. 진짜 작았어."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듯 서로를 보며 깔깔 웃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옷을 벗겨주었습니다. 그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한 시절의 온도였습니다.
다이어리를 덮고, 옷을 하나둘 상자에 담았습니다. 봄의 셔츠, 여름의 원피스, 가을의 스카프, 겨울의 패딩. 그렇게 박스 안에는 네 계절이 차곡히 쌓였습니다.
버리기에는 아까운 기억들. 간직하기엔 무거운 마음들.
저는 상자를 덮으며 천천히 중얼거렸습니다.
"계절은 다시 오지만, 같은 온도로 오진 않지."
손끝에 묻은 먼지를 털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정리란 단순히 '끝내는 일'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마음을 위해 공간을 비워두는 일일지도 모른다고요.
그날 밤, 저는 다이어리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몇페이지는 비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계절을 적어 넣기 위해 남겨둔 여백 같았습니다.
오늘은 그 여백을 채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조용히 불을 끄고, 내일의 계절이 어떤 온도로 찾아올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그 계절은 조금 다른 색으로 올 것입니다.
다음화 <빈서랍, 채워지지 않은 우리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