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 한쪽, 남편이 새로 조립한 서랍장이 있습니다.
오래된 책장을 대신해 놓은 그 서랍은 깔끔하고, 가지런하고, 약간은 낯설었습니다.
서랍장일뿐인데 왜 낯설까요?
저녁식사 후, 그는 한참 동안 서랍을 정리했습니다.
케이블은 첫 번째 칸. 서류는 두 번째 칸. 리모컨과 볼펜은 세 번째 칸.
라벨지에 깨끗한 글씨로 이름을 적어 붙였죠.
"이건 비워둘까?"
그가 가장 아래칸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응. 그냥 그렇게 두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비어 있는 서랍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습니다. 손가락으로 하얀 바닥을 쓸어보기도 했죠. 마치 그 비움이 불안한 것처럼.
그에게 빈 공간이란 늘 '무엇으로 채울 곳'이었으니까요.
‘더 정리할 것 없나?’하며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그가 거실로 나간 뒤, 저는 그 서랍 앞에 앉았습니다.
불빛이 잔잔히 비추는 하얀 서랍 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손끝으로 바닥을 쓸어보니, 나무결이 부드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공백이 편안했습니다.
정리란 늘 채우거나 버리는 일이었는데, 이건 그 어느 쪽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두는 일'이었죠.
저는 잠시 서랍 안을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있던 낡은 메모지 한 장을 꺼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썼던 글씨.
'엄마,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던 메모지.
조심스럽게 서랍 한구석에 놓았습니다.
이 서랍이 꼭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면, 그건 정리가 아니라 기억의 자리여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서랍을 열었습니다. 동작을 멈췄죠. 메모지를 들어 올려 한참 바라보더니, 작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괜찮은 것 같네. 이건 잠시 그냥 두자."
그의 목소리에 묘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버리라고 할까봐 걱정을 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아마 그도 느꼈을 겁니다.
서랍이 완전히 비어 있지 않아도,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따뜻하다는 걸요.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빈 서랍은 우리 가족의 작은 보관함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그린 나무 그림 한 장. 작년 여행에서 주운 조개껍질. 영화표 두 장. 처음 만났던 카페의 영수증. 쓸모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의 시간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습니다.
정리를 하며 배운 건 이것이었습니다.
모든 공간에는 '용도'가 있지만, 모든 용도가 '이유'일 필요는 없다는 것.
그냥 비워둠으로써 살아나는 온기가 있고, 그 안에서 조용히 숨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밤이 되어 불을 끄기 전, 저는 마지막으로 서랍을 열었습니다.
안쪽에서 약한 종이 냄새가 났습니다. 오래된 메모지와 새 서랍이 만든 냄새.
그건 어쩐지, 우리가 살아온 날들의 냄새 같았습니다.
조용히 서랍을 닫으며 생각했습니다.
비워둔 자리가, 때로는 가장 충만한 공간이 된다는 것을.
이제 우리 둘 다 알고 있습니다.
다음화 <마음에 남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