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싱크대 위쪽 선반에는 작고 낡은 박스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이사 온 뒤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상자들. 오늘은 괜히 마음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를 조심스레 열자, 하얀 완충지 사이로 머그컵 두 개가 나왔습니다.
쌍둥이들이 태어났을 때 찍은 얼굴 사진이 인쇄된 컵이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얼굴, 미소도 아직 서툴고, 눈빛은 흐릿하지만 따뜻했습니다. 여동생이 만들어 선물했던 것. 받아온 뒤 그대로 박스 속에 넣어둔 채,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컵을 꺼내 싱크대에 놓고 흐르는 물에 헹구었습니다. 물방울이 얼굴 위에 맺히자, 아이들이 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이 컵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기 때 얼굴이라 아까워서였을까. 아니면 그 시절을 마주보는 게 두려웠던 걸까.'
'두려운 시절도 잊고 싶은 시절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나서야, 조용히 웃음이 났습니다. 아마도 기념컵이기에 사용하기가 어려웠던 것이겠죠.
따뜻한 물을 붓고 한 모금 마셨습니다. 낯선 컵인데도 이상하게 손에 익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컵은 새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기억의 한 조각이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얼굴들이 부엌 조명 아래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잠시 뒤 남편이 들어와 물었습니다.
"그건 뭐야? 처음 보는 컵인데."
"여동생이 준 거야. 쌍둥이들 태어났을 때."
"그걸 이제야 꺼냈네." 남편이 컵을 들여다보며 웃었습니다.
"이렇게 작았구나. 귀엽다."
"응. 나도 까먹고 있었어."
“막 태어난 얼굴이라 예쁘지는 않지만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켠이 찡했습니다.
왜 이제야 이 컵을 꺼냈을까. 어쩌면 나는 이 컵 속의 '그때의 나'를 감당할 준비가 이제서야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컵을 씻으며 문득 예전의 머그컵이 떠올랐습니다. 손잡이에 금이 간 그 컵. 그건 보냈지만, 이건 남았습니다. 하나는 작별의 상징이었고, 하나는 다시 만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정리란 이렇게 한쪽을 비우면, 다른 쪽이 살아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이 되어 설거지를 마치고 부엌 불을 끄려다, 싱크대 위에 놓인 컵을 다시 한 번 바라봤습니다. 조용한 조명 아래에서 아이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빛났습니다.
그 웃음은 여전히 제게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우린 여기에 있어요.'
정리는 물건을 버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 남은 목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었습니다.
잊고 있던 사랑을, 놓쳤던 순간을, 그리고 여전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오랜만에 상자 하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제가 찾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는 오래된 다이어리 정리 시간입니다.
페이지마다 남은 말들을 천천히 읽어내리며, 또 다른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려 합니다.
다음화 <박스 속의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