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승부욕을 감추며 살아야 했던 이유
작가 『김랄라』
나는 승부욕이 강한 편이다. 살면서 승부욕 때문에 시작하고 끝맺은 일이 많다. 적당한 승부욕은 새로운 일을 하기 앞서 열정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지나치면 마치기도 전에 모든 걸 태워버린다. 자제하지 않으면 득보다 실이 더 크고 묘한 중독성 때문에 떨쳐내기도 힘든 기질이다.
내가 승부욕을 최고로 불태울 수 있는 분야는 바로 운동이다. 이때 느끼는 승부욕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고 말겠다는 충동의 스위치를 켠다.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나를 더 몰아붙이고 승패에 대한 절망감 또는 성취감이 자존감으로 이어진 적이 많다. 지금은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지만, 아무 때나 툭툭 튀어나오는 이 승부욕을 어렸을 때는 꽁꽁 감추며 살았다.
초등학생 때 일이다. 체육 시간에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날이었다. 마치 어겨서는 안 될 규칙처럼 남학생들은 축구를, 여학생들은 모여서 피구를 시작한다. 몹시 더운 여름이었고 그날도 나는 피구에 과하게 몰입해 있었다. 체육 시간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는데 한 남자 동급생이 나를 보고 땀을 너무 많이 흘린다고 놀려댔다. 입고 있던 옷이 땀에 흠뻑 젖어있어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그 친구를 보았는데 그 애 역시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땀에 양을 따져 놀리는 거라면 어느 정도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의 뉘앙스는 다른 여자애들에 비해, 다른 남자애들처럼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그 친구는 내가 어쩌다 피구가 아닌 축구를 할 때마다, 팔과 다리에 털이 많다는 이유로, 힘이 남자처럼 세다는 이유로 놀렸다. 나는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때마다 속으로 내 취향과 외모와 승부욕을 계속해서 의심했다.
중학생 사춘기 시절에는 의심이 더욱 심해졌다. 나는 땀이 나고 머리가 망가지는 체육 시간을 싫어하게 됐다. 그때의 나는 다른 여자인 친구들과 달리 보여지는 게 싫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대한 그들을 따라 베끼려 했다. 다행히(?)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때와 중학생 시절 극과 극인 나의 별명을 보시라. ‘조폭마누라(힘이 세다는 이유로)’와 ‘현모양처(단정하고 차분하게 보인다는 이유로)’. 그 후로도 나는 승부욕을 숨기고 나를 감추며 성인이 됐다.
하루는 남동생과 집 앞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는데, 승부에 열정을 보이는 내 동생과 달리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라켓을 흔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은 승부욕 없는 나와 배드민턴을 치는 게 재미없다고 말했다. 그때 느꼈다. 나를 위태롭게 지탱해주던 무언가가 무너지는 느낌을. 그 틈에서 스스로 지워갔던 진짜 내 모습이 보였다. 어린 시절 나는 땀 흘리며 운동장에서 뛰어 노는 걸 좋아했고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아이였다. 운동장에 가만히 앉아 남자애들이 공 차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뛰어 놀고 싶은 여자 아이였다.
스스로 부정했던 운동에 대한 승부욕을 되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대학생이 되면서 몸매 강박을 조금씩 버리게 됐고(내 몸을 긍정하기까지의 이야기 보러 가기)좋아하는 운동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승부의 맛을 다시 느끼게 됐다. 지금도 운동을 하며 승부의 단맛을 느끼는 중이다. 매일 30분씩 달리기를 하며 기록을 단축시키는 재미에 빠져있다. 어제의 나와 겨뤄 이기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다. 페이스 조절은 필수고 틈틈이 근력 운동도 해줘야 어제의 기록을 깰 수 있다. 또 매일 반복해야 하는 피곤한 일이지만 달리는 동안에는 다시는 나를 잃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학창 시절의 나로 돌아간다면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다.
“너의 승부욕은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이야. 감추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제대로 보여주자.“ 과거의 나처럼 자신의 모습을 감춰야만 했던 여자 친구들에게도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