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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병원으로 전원되다

생활치료센터에서의 2주가 끝나고 구급차를 다시 탄 오늘


지이이잉, 지이이잉. 책상 위에 둔 핸드폰이 자기 좀 봐 달라며 몸을 부르르 떤다. 아침부터 모르는 번호로 들어온 전화이다. "여보세요?" 하고 받았더니 "OOO님, 여기 의료지원반이에요. 잠시만요, 담당 교수님 바꿔드릴게요." 전화를 건네받은 여자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보세요? OOO님이시죠? 일부 증상이 14일이 지나도록 호전이 되지 않아서 병원으로 전원 하여 계속 치료할 예정이에요. 센터 옆에 있는 OO병원으로 가실 겁니다." 나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예상은 하고 있던 바였지만 그래도 뭔가 씁쓸했다.


어제 오후 늦게까지 생활치료센터 퇴소에 관한 연락이 오지 않아 조심스레 의료지원반에 현재 상황을 물어봤다. 돌아온 답변은 '퇴소는 증상이 없거나 약을 끊고 완화되는 추세가 명확히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OOO님 같은 경우 아직 약 복용 후에도 증상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라 내일 퇴소는 어렵다는 게 담당 교수님 판단입니다. 격리 해제 날짜는 개개인의 임상경과 기반 기준으로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고, 퇴소 불가능한 자는 72시간 추가 관찰 후 재확인을 받거나 치료를 위한 병원 전원이 고려될 수 있습니다.'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격리 해제에 의한 퇴소는 익일 불가하다는 말과 함께 의료진들이 내 치료에 대해 신경 써서 적절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며 익일 오전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익일인 오늘 아침이 되었고, 나는 병원 전원이 확정되었다. 그 사이 자가격리 해제를 앞둔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전날 시행한 남편과 아들의 코로나 재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아 3시간 후에는 진짜 기나긴 대장정이 끝난다는 기쁜 전화였다. 그에 반해 나의 병원 전원 소식은 약간은 김새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남편과 좋게 좋게 생각하자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306호의 전화벨이 울렸다. "OOO님이시죠? 여기 상황실인데요, 병원으로 전원 가는 거 아시죠? 10시에 병원으로 이송할 구급차가 올 예정입니다. 개인 짐을 싸고 계시면 됩니다."




시계를 보니 내게 남은 시간은 30분밖에 없었다. 서둘러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요긴하게 사용할 꼭 필요한 물건들만 몇 개 빼고 내가 사용했던 물건들을 의료 폐기물 통에 다 버렸다. 나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우는데 뭔지 모를 섭섭함을 느꼈다. 나를 15일이나 머무르게 해 준 이 방이 고마웠다. 편견 없이 나를 받아줬고 눈물이 날 때마다 나의 눈물과 탄식을 오롯이 다 받아줬던 그런 공간이었다. 떠나려니 왠지 모르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머물렀던 공간을 사진 한 장 한 장에 담아본다. 눈 뜨면 보이는 산 풍경이 그리울 것만 같아 한참이나 쳐다봤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스크를 착용한 뒤 겸허히 현관 앞에 앉아 있었다. 10시 2분, 306호의 전화벨이 울렸다. "OOO님, 짐 다 싸셨으면 개인 짐이랑 명찰 챙겨서 계단으로 지하 1층에 내려가시면 됩니다. 이송할 구급차 대기 중입니다." 그렇게 나는 306호와 이별을 했다. 코로나랑 아직은 이별을 하지 못한 채. 아쉬운 문을 닫는다. 철컥.


15일 만에 다시 만나는 바깥공기는 꽤나 찼다. 그 사이 나무들도 서서히 가을로 물들 준비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잠깐이었지만 꽤나 긴 시간인 것만 같다. 입소할 때처럼 내 손에 캐리어 하나를 들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이대로 집에 가면 참 좋으련만 아쉽게도 또다시 병원이다. 그래도 생각한다. '그래, 나을 때 제대로 나아야지! 가서 제대로 집중치료를 받아보자!' 생각하며 지하 1층에 다다랐다. 하얀 방호복을 입은 선생님이 나를 맞아줬다. 저 쪽에 서서 손 소독 젤로 먼저 손을 닦으라고 했다. 그리고 살균제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뿌리고 본인의 짐에도 살균제를 뿌리라고 했다. 나는 손이 뻗어지는 한 최선을 다해 내 몸에 살균제를 뿌려댔다. 나의 캐리어에도 코로나 한 방울 남기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열심히 뿌렸다. 그제야 구급차 이송 선생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내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한 뒤 구급차에 올라타라고 했다. 함께 동승할 수 없으니 잘 잡으라고 했다. 병원이 바로 옆이니깐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했다.




구급차 안은 비닐로 뒤덮여 있었고 창문까지 완전히 가려져 있어서 어두컴컴했다. 바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나와 캐리어만 남겨져 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소요됐을까. 구급차는 어딘가에 멈춰 섰다. 차는 멈춘 지 한참인데 나를 구급차에서 꺼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바깥이 웅성웅성하다. 드디어 구급차 문이 열렸다. 제일 먼저 하얀 방호복을 입은 두 명의 선생님이 보였다. 그들은 내게 다가와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었다. 그리고 내게 파란색 비닐옷을 입혀주고 손에는 비닐장갑을 씌워줬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본다. 병원의 지하주차장인 것 같았다. 저 멀리 여러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걔중에는 핸드폰으로 내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존심이 약간 상했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했다. 나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코로나 확진자니깐.


한 여자 선생님이 내 캐리어를 끌어주었고 나는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마치 비밀의 통로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최대한 사람과의 접촉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니 내가 가는 길이 평범한 길은 아니리라. 엄청나게 큰 엘리베이터에 하얀 방호복을 입은 선생님 두 분과 함께 탔다. 나는 그들을 배려해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다.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멈춰 섰다. 여자 선생님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고 나는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따라갔다. 저 멀리 유리 너머로 나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처음에 구급차에서 내렸던 것처럼 누군가는 또 핸드폰으로 나를 촬영하기도 했다.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가 이런 느낌일까. 상당히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처지가 이러니, 원. 그러나 곧 나는, 사람들이 나를 왜 구경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병실로 이송 중이니 진로 진행을 잠시 멈춰달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니 모든 의료진들이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유리 너머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발걸음은 한 음압 병실 앞에 멈춰 섰다. 병실 앞에는 이미 내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병실에 들어갔다. 먼저 비닐옷과 비닐장갑을 벗고 환자복으로 환복을 했다. 잠시 후, 하얀 방호복을 입은 선생님들이 들어와 심전도 검사부터 몸무게 측정, (그 사이 나는 2kg가 쪄 있었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채혈, 입원 수속 등을 빠르게 진행했다. 입원을 하자마자 나는 물이 걱정되었다. 나는 정말 물을 좋아해서 하루에 2L 정도는 거뜬히 마시는데 음압병실 안에 정수기가 따로 없었다. 생활치료센터에서는 아리수를 요청하는 대로 갖다 주셔서 물에 대한 부담 없이 마시고 싶은 만큼 마셨는데 이곳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조심스레 여쭤봤더니 음압 병동은 보호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간호사 선생님들께서 필요한 물품들을 직접 사다주시는 시스템이었다. 입원을 하면 퇴원할 때까지 내 신용카드 하나를 병원에서 보관한다. 생수, 세면도구, 슬리퍼, 종이컵, 수건, 기저귀는 간호사실에 요청하면 병원 내 편의점에서 직접 사다주시는 거였다. 그 외에 물품은 개인적으로 택배를 이용해야 한다. 생활치료센터와 다른 점은 보호자로부터 소지품 및 물품을 전달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호자가 로비에 물품을 맡기면 간호사실에서 내게 전달해 주는 시스템이다. 나는 물만 있으면 됐다. 그걸로 족하다.




모든 의료진들이 내 병실에서 나가고 나 홀로 남았다. 24시간 CCTV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 어색했지만, 병원에 오니 내 마음이 조금 더 안심되는 것도 있었다. 여기에서 더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금세 회복해서 밖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한줄기 희망이 보였다. 다행히도 병실 밖의 풍경이 생활치료센터에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압병실이라 창문조차 열 수 없지만 밖으로 보이는 산의 풍경이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되었다. 센터에서 보던 산과 같은 산이라 그런지 친숙하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내가 병실에 적응하는 사이, 우리 집 이사도 완료가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남편이 전해주었다. 2주간 자가격리하면서 혼자 이사를 준비하고 자가격리 해제와 동시에 집안에 갇혀 있던 그간의 모든 쓰레기를 버리면서 남편 홀로 고군분투 한 이사였다. 남편의 목소리에서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내가 밖으로 나가면 남편에게 꼭 휴가를 주리라 다짐했다. 갑자기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남편이 아프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2주 만에 바깥세상으로 나온 아들도 모든 것에 행복해했다고 여동생이 전해줬다. 길 가다 만난 개미에게, 나무에게, 꽃에게, 분수에게, 심지어 파이프에게도 기쁨의 인사를 건네었다는 우리 아들. 조카의 해방을 위해 오늘 하루 휴가까지 내고 달려와 준 이모가 사준 야광스티커를 영상통화로 내게 자랑하는 아들의 표정에서 약간의 안도감과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우리 모두가 너무나 고생했던 2주였다. 남편과 아들의 자가격리도 진짜 해제되고 이사도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건 진짜 나 하나뿐이다. 나만 잘 회복되면 된다. 어제까지는 긴 터널 끝에 다시 출몰한 또 다른 터널이 밉기만 했는데, 그래도 오늘은 모든 것에서 감사함을 느낀다. 끝날 줄 알았던 나의 코로나 옥중일기는 이렇게 제2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 같은 내 인생이지만, 이런 게 인생이지! 

Viva la v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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