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고 억울한 날에

카모마일(chamomile)

by 권도연

학명 : 카밀레 [Perennial Chamomile]

어원 : 땅에서 나는 사과

꽃말 : 역경 속의 힘(Energy in Adversity)


* 효과 : 만성적인 긴장, 불면, 신경성 소화불량, 메스꺼움, 변비, 과민성 대장 증후군, 두통과 천식에 유용하다.

*카모마일은 저먼 카모마일과 로만 카모마일 두 종류인데, 진정, 진통, 가스 배출 효과가 뛰어난 것은 로만 쪽이다. 저먼은 라벤더, 제라늄과 블렌딩 하면 피부염, 습진, 가려움증에 효과가 좋다

*특히 과도한 자아의 욕망과 좌절, 분노, 여기에서 수반되는 각종 우울감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완화시켜 준다.

*카모마일은 씁쓸한 사과향이라 할 수 있는데, 사과향은 따뜻한 느낌을 주고 씁쓸한 향은 현실감을 일깨워 심리를 안정시킨다.






"카모마일 두 잔요. "


나는 그가 무엇을 마실 것인지 질문도 않고 주 문부 터했다. 내 것 역시 카모마일이었다.

선배를 만나는 날은, 카모마일을 마시는 날이었고, 마셔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선배에게 sos를 친 오늘, 나의 기분은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


비와 눈이 섞여 날리던 그날도 오늘과 같았다.

나는 난생처음 '배신'이란 감정을 마주했다.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손끝까지 떨렸다.

"모카 프라푸치노에 초코 시럽 추가해주시고 휘핑 듬뿍, 드리즐 추가, 자바칩도 넣어.."


아뇨.

선배는 계산대에 선 내 말을 잘라먹으며 카페 사장에게 엉뚱한 걸 주문했다.

카모마일 두 잔요.


당이 떨어진다고요. 스트레스받아먹어야겠다고요.

아니. 스트레스 때문이라니까 더 안돼. 왜 그렇게 널 함부로 대해.


함부로 라니. 초콜릿, 캐러멜, 설탕, 바닐라가 얼마나 축복스런 단어인데.

포도당. 과당 등의 단당류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두뇌를 활발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감소시킨다는 의학적 증거 또한 차고도 넘쳤다. 그런데 선배는 정신과 의사처럼 심심하다 못해 따분한 차를 마시라고 하고 있었다.



노랗고 투명한 찻 잔 앞에 멍하니 앉았다.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뭐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꿀꺽.

억울함, 우울함, 분노, 열감 등의 어두운 감정을 당분으로 덕칠 해 온 나를

카모마일은 있는 그대로 차근차근, 서서히 매만져 주었다.


"커피가 잠을 깨게 한다면, 카모마일은 감정을 깨게 한다고나 할까."


덕분에 나는 그날, 나의 감정을 정직하게 마주했다.

그리고 차 한 잔을 다 비울 때쯤 결심했다.

직장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만난 인연이 나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에 인생을 걸지 않겠노라고.

전장인 직장에서 친구의 우정을, 가족의 격려를 기대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깨달았다.

'내 편'이 '내 적의 편'일 수도 있다고.

나를 지키는 건, 오로지 나. 나. 나.

그렇게 가슴에 새기듯 못을 박았다.


믿었던 상사가 나에게 고과 0점을 주었다고 했다.

동생 같다며, 잘해보자며, 갖은 말로 칭찬하고 어르던 그가 나의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나의 첫 감정은 놀람이었다. 그리고 분노, 거기에 그간 그에게 베풀었던 나의 호의에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심장을 타고 목까지 차올랐다. 화장실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싶었지만 퉁퉁 부은 눈으로 사무실로 돌아가기 싫었다. 운다는 것은 나에 대한 그의 평가를 인정하는 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울음을 삼켰더니 두통이 찾아왔다. 부적절한 분노와 엄습해 오는 긴장은 어깨와 목덜미, 뇌를 마비시켰다.


그런 나에게 친한 선배가 카모마일을 알려준 것이었다.

치 떨리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고 멀리 떨어져 나를 객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카모마일의 효과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나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날이면 카모마일을 찾아 마셨다.






나를. 나의 감정을 온전히 마주해야 하는 날, 카모마일.


데이지 꽃과 비슷한 모양의 카모마일은 순수한 마음의 넓은 관용을 상징한다. 수많은 작은 꽃들이 모여 꽃송이를 이루는 특징 때문에 통합과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경우 간과 심장의 열이 나는데, 카모마일 오일은 간의 기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간의 열을 식혀 화난 영혼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갑작스러운 분노 표출 후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실제 카모마일은 유럽에서 차(tea)로 이용되면서 건강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카모마일에 포함된 아피제닌은 불면증 개선에도 효과적이며, 소독과 살균 효과가 있어 피부 진정에도 좋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상큼하고, 차분하며, 우아한 향을 핸드워시로 만들어주면 어떻겠냐는 거야."


조향을 공부한다는 나에게 선배는 헤어지는 말미에 이렇게 얘기했다.


카모마일 향? 물론 시도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땅 속의 사과'란 이미지의 카모마일을 향으로 실현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비슷한 계열의 꽃향을 섞으면 향은 써졌고, 망향의 베이스로 알려진 머스크를 쓰면 카모마일 특유의 상큼함이 흐려졌다.


카모마일을 베이스로 한 향수가 시중에 출시되긴 했었다. 구찌(GUCCI)의 메모아 뒨 오더.



하지만 역시나 내 평가론 실격이다.

꽃향보다는 나무향에 가깝고, 차분함보다는 달콤함에 가까운 향이었다. 차로 끓여 콧속으로 전해지는 카모마일 그대로 향수를 만들기란 구찌의 자본력도 어려웠던 것이리라.


"선배, 그냥 5천 원짜리 카모마일 티 한 잔이 최고야."






다시 조향을 해보기로 했다.

BGM은 이루마, river flows in you.


로즈, 베르가못, 일랑일랑, 재스민, 라벤더..

플로랄 계열의 오일들을 주욱 나열하고 보니 모두 합성 화학품이다.

로즈 '같은', 베르가못 '같은', 일랑일랑 '같은', 재스민 '같은', 라벤더 '같은'.

말 그대로 인공향이다.


카모마일 향도 어쩌면 내 기억 속의 '그날의 향'일 수 있었다.


괜찮다고, 속 시원하게 너의 속 마음을 다 털어놓으라고 말하던 선배의 핸드크림 향.

찻잔 속 반짝하고 투명하게 빛이 나던 카모마일 티백의 샛노란 향. 그리고 내 눈물의 짠맛까지.

베라가못 + 애플을 베이스로 한 기억 속 '카모마일 향'을 만들어냈다.


이름은. Believe in You.했다.

감정이 폭발하는 날 구석에 앉아 킁킁거릴 나만의 위로 레시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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