깽! 마리의 하네스 줄을 잡고 걸어가던 중 들리는 짧은 비명소리, 재빨리 아이를 확인하고 뒤를 돌아봤는데 머리가 희끗한 나이 든 남성 한명이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당시 앞만 보고 가고 있던 중 일어난 일이라 이 아이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명소리만은 마리가 낸 게 분명했다. 주변에 강아지라고는 마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나이든 남자, 모든 상황이 직감적으로, 그가 마리를 발로 찼거나, 지팡이로 때렸거나 등의 폭력을 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고의이든, 아니었든 쫓아가서 그 남자를 잡아야 했었다. 그러나 난 가만히 있었다. 제자리에 선 채로 멀어져 가는 노인을 그냥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리고 바보처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했고 늘 젊은 사람들로 붐비는 카페거리에서 노인과 실갱이하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내가 순간적으로 대고 싶었던 핑계였다. 쉽게 말해서 비겁하게 침묵하는 쪽을 택했던 나는 마리를 데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가고 말았다. 난 스스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기억은 2년 정도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마음속에서 재현된다. 빙신 같았던 그 기억은 이후로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약 역할을 해 왔다.
살면서 가장 화가 나는 기억은 누군가로부터 해를 입었던 순간이 아니다. 나를 해코지 했던 상대로부터 당당하지 못했던 내 모습을 마주했던 기억이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는 비참한 곳으로 자신을 숨겼던 모습을 애써 합리화 했던 때이다. 생각해 봤는데, 나에겐 그런 순간이 화가 날 만큼 많았던 것 같다.
크게는 한 15년 전쯤이었을까, 직속 상사가 주도하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부터 용기 내어 대항하지 못했고, 작게는 가까운 사람들의 무례한 언행에 즉각적으로 쏘아붙이지 못했던 기억과, 사랑하는 반려견이 어떤 식으로든 해를 입었을 때 가만히만 있었던 기억, 모두 내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방치했던 순간들이다.
지금은 그나마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처럼 약자를 보호하는 법적 시스템이 미약한 곳에서는 나를 침범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알아서 방어해야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
직장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게 심각한 가해이자 범죄라는 인식조차 없던 때였다. 나는 피해 사실을 가장 가까웠던 가족과 남자친구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했었다. 노동부나 회사 내 인사부에 얘기할 생각은 더더군다나 할 수 없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은 인권이 뭔지도 모르는 국가였다. 인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건 최근부터였다. 하물며 동물권에 대해서는 뭘 바랄 수 있을까?
최근 동물보호 협회 앞에 반복적으로 고양이를 죽여서 버린다는 사이코 패스를 찾는다는 인터넷 공고를 보게 되었다. 투명하고 큰 비닐에 사체를 담고 묶는 방식과 뾰족한 무언가가 아닌 둔기로 내리쳐서 죽이는 방식 등으로 보아, 같은 놈의 범행일 확률이 높다는 추측과 함께 공고에는 보고 싶지 않았던 여러 장의 사진이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온 몸이 따뜻해졌다. 피가 발끝에서 머리 위로 솟구쳤으므로. 협회에서 내 놓은 그 뉴스의 말미에는 ‘범인을 꼭 찾아내어 죗값을 치를 수 있게 해주세요. 목격자를 찾습니다.’ 와 같은 호소가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보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잔인하게 고양이를 죽였다고 과연 저지른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기나 할까?’
누군가가 내 반려견을 해친다고 해도 상대에게 벌금 이상의 응징은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최선의 방책은 내 강아지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점이 참 씁쓸하다. 사는 게 참 위태롭다.
카페거리의 그 사건이 있은 후, 그리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된 이후로는 죄 없는 마리에게 시비 거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달려든다. 이 얘기를 하고 보니, 반려동물이 있는 집이 천만 가구나 된다는 이 나라에서 동물에 대한 혐오와 반감이 아직까지 들끓고 있다는 점이 그저 놀랍지만, 산책시키는 강아지의 배변에 시비 거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아마도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견주들로 인해 생긴 혐오겠지만 그래서인지 배변을 하는 모습만을 보고도 불쾌한 말을 내 뱉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겪게 된다. (대변은 치우면 그만이지만 소변은 어쩌라고, 밖에 나온 강아지의 방광을 묶으란 말인가.)
마리가 멸시를 당하거나 욕설을 들었을 때, 난 이제 내 온 몸을 걸고(?) 싸운다. 거리에 사람이 얼마나 있던, 상대방의 나이가 어떻게 되던 간에 내 강아지에게 작은 해코지라도 가한 사람에게 가만히 있지 않기로 한 이후부터는 그렇게 되었다. 슬픈 일은, 그리 마음먹은 이후로 생각보다 싸울 일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언제쯤이면 한국에도 반려동물과 자연스럽게 함께 사는 성숙한 문화가 오게 될까?
그렇게 쌈닭이 되었어도, 예전과 같은 트라우마는 남지 않게 되었으니 길에서 싸우고 있는 내 모습에 오히려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한다. 적어도 이젠 매 순간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호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당당한 기분 때문인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