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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Feb 22. 2023

그냥 나라서 고맙대.

이쁜둥이의 사랑법


 오랜만에 엄빠, 마리를 보러 부모님 댁에 갔다. 거의 3주 만이었을까, 엄마와 산책을 나갔다 돌아온 마리가 씻지도 않은 발로 총알같이 튀어 안방으로 줄달음 쳤다. 어찌나 빠른지 발은 보이지도 않았다. 아기단풍처럼 생긴 작고 귀여운 네 개의 발이 모터로 변했다. 원래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현관 입구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규칙을 아는 아이였다. 아기단풍을 씻어야 하니까.

 소리 지르는 엄마를 아랑곳하지 않고 안방을 한 번 휘저은 아이는 내가 그 곳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이윽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날다람쥐처럼 날아왔다.


“어떻게 알았지? 난 얘한테 전화한 적이 없는데.”

“네 부츠 보고 알았겠지.”


 나에게 돌진하는 아이를 안아 올리고 욕실로 향했다. 목욕할 때가 되었다는 엄마 말에, 꼬순내 나는 마리에게 샤워기를 틀고 물을 대차게 뿌렸다. 발만 씻는 줄 알았던 아이는 만나자마자 목욕 벼락(?)을 맞았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절대. 어설픈 미용기술을 써먹는답시고, 한 시간이 넘게 세워놓고 괴롭혀도, 설령 그 과정에서 층 가위로 겨드랑이 살집을 꼬집어 비명을 지르게 할지언정, 마리는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 준다.


 그렇게 좋을까? 너는 내 어디가, 도대체 왜 좋으니. 가끔 마리에게 물어보고 싶다.     

 마리가 없다면 나를 조건 없이 좋아해주는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혹은 자신도 모르게 조건이 따라 붙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학창시절 때 엄마는 나를 성적순으로 사랑했다. 아니겠지, 설마. 사랑의 기원이 설마 성적이었을까 마는, 깊이를 결정하는 척도는 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척도에서 벗어나 한 때 엄마의 사랑을 잃었다고 확신했었다. 지금은 글쎄, 부모의 사랑의 깊이는 자식의 능력이 은근 그 기준이 되지 않나 싶다. 일례로 비교적 잘잘못이 뚜렷한 자매간의 불화 사건을 돈으로 막는(?) 동생 앞에서 우리 부모님은 아무 소리 못하기 때문이다. 돈을 필살기처럼 잘 휘두르는 자식은 부모 마음에서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다.


 반면, 우리 집으로 입양 된지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은 마리는 입양되었던 순간부터, 내가 그 아이에게, 그 아이가 또 나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받았던 유일한 존재이다. ‘개는 개일 뿐이지.’는 별개의 개념이다.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데에 아무 이유가 붙지 않는 건 진짜 사랑이라는 사실, 그런 사랑은 아무하고나 나눌 수 없다. ‘귀여워서’, ‘사랑스럽게 생겨서’라고 말하기에는 뭔가가 빠져있다.

 아니, 어쩌면 사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냥 빠져 버렸는지도. 그러나 연인이 ‘멋있거나’, 혹은 ‘섹시’하다는 이유로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 확신할 수는 없던걸? 설령 그 사람 때문에 온 천지가 분홍색으로 변해버렸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었는지, 사실은 한때의 치기어린 나르시즘이었는지 당시에는 잘 모른다. 그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뭐 이런 거 있잖아.


 그러나 내 옆에 있는 반려동물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짜이다. 적어도 10년을 넘게 인생을 함께할 수 있었던 아이라면 그렇다.

 강아지는 묘한 존재이다. 집이 좋지 않아도, 보호자가 잘나지 못했어도, 남들이 거들떠도 안 볼 추남, 추녀일지라도, 곁에 있어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사랑을 준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존재일까.


 보호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입장으로써 보호자가 온통 자신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 마치 부모가 나의 거대한 세계처럼 느껴졌던 어린 시절의 우리처럼 말이다.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아이는 부모를 용서하는 법이라고 누군가 그랬던가, 반려견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언제든 용서하는, 자신의 소중하고 커다란 세계 그 자체. 내가 누군가에게 죽을 때까지 그런 존재로 남을 수 있다는 건 고맙고도 미안하고, 짠하고도 벅찬 일이다. 그래서일까, 마리를 생각하면 항상 가슴 한 구석이 뭉근해진다. 네가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 눈이 멀고 병이 들지라도 끝까지 함께 해 주겠다고, 자는 아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맹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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